500년 名家의 빛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제''

    입력 : 2002.01.16 18:50

    조용헌교수 ''한국 대표 15곳 내력'' 책으로 펴내

    지조를 최고의 덕목으로 치는 경북 영양의 한양 조씨 호은 종택(위사진),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라고 훈계했던 경주 최부잣집의 쌀 창고.
    ## 조용헌교수 '한국 대표 15곳 내력' 책으로 펴내 ##

    지조의 선비 조지훈(1920~1968)을 배출한 경북 영양의 한양 조씨 호은 종택
    에는 ‘삼불차’란 가훈이 370여년간 전해내려온다. 재물과
    사람과 문장 등 세가지만은 다른 곳에서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인격적으로 창녀와 다를 바
    없다”고 질타하며 일제 시대와 독재 치하를 헤쳐온 지사 조지훈을
    길러낸 것은 명문가의 엄정한 도덕과 윤리였다.

    무엇이 한 가문을 명가로 만드는가. 조용헌 원광대 교수가
    조선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서 대표적 명문가로 꼽혀온
    15개 집안을 현장 답사, 이에 대한 대답을 담은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푸른 역사)를 펴냈다. 돈많고 권력있는 집은 많아도 참다운
    명문가의 금도를 찾기는 어려운 현실. 이 책은 15개 집안의 역사와
    자녀교육, 치부에서 풍수 비기까지 따지면서 이들을 명가이게 만든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제’(지배층의 솔선수범)는 무엇인가 파헤친다.

    12대 만석꾼, 9대 진사를 배출한 경주 최부잣집. 요즘 말로 하면 조선
    최대 재벌집안인 이 가문에도 400년간 가훈이 전해진다.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흉년기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사방
    100리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하라.” 재산이 만석을 넘으면 소작료를
    낮춤으로써 부의 혜택이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게 하고, 남의 불행을 내
    재산을 챙기는 기회로 악용하지 말라는 원칙이다. 최부잣집은 과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데만 일년에 1000석을 쓸 정도였다. 하지만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수저도 은수저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정쟁에 휘말려 ‘멸문지화’를 당하는 일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권력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최 부잣집의 만석 재산은 12대에서
    끝났다. 해방 직후 영남대에 재산을 다 기부해버린 것. ‘명가’다운
    선택이었다.

    한국에서 책을 가장 많이 소장한 가문으로 손꼽히는 대구 달성군의 남평
    문씨. 문씨 문중이 운영하는 ‘인수문고’에는 약 8500책, 2만권
    분량의 책이 보관돼있다. 전국의 문인들이 찾아와 책을 열람하고 학문을
    논하는 문화공간이다. “규장각과 이왕직 도서관에서도 보지 못하던 책이
    상당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이 문고는 1910년 나라가 망하던 시기에
    설립됐다. 남평 문씨들은 “일제가 세운 신식학교에 자녀들을 보낼
    수없다”며 집안에서 직접 가르치기 위해 인수문고의 전신인
    ‘만권당’을 설립했다. 땅과 재물이 아니라 지혜를 물려주겠다는 가문의
    긍지가 담겨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학봉 김성일(1538~1593) 후손은
    자존심을 목숨처럼 지켜온 가문이다. 학봉의 11대 종손인
    김흥락(1827~1899)은 항일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정부에서 훈장을 받은
    제자들만 60명을 배출했다. 그의 손자 김용환(1887~1946)은 파락호로
    철저히 위장, 종택에 내려오던 전 재산인 땅 18만평을 모두 독립군
    자금으로 보냈다. 집안 사람들도 그를 노름꾼으로 알았지만, 해방 이후
    만주 독립군에게 돈을 보낸 사실이 밝혀져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밖에 “때를 기다린다”(경남 거창 동계고택), “덕을 쌓아야 인물
    낸다”(서울 안국동 윤보선 고택), “나보다 못한 사람을
    생각한다”(죽산 박씨의 남원 몽심재), “내뜻에 맞게 산다”(전남
    해남의 윤선도 고택), “정신의 귀족을 생각한다”(충남 아산 외암마을의
    예안 이씨 종가), “우물을 파려거든 하나만 파라”(전남 진도의 양천
    허씨 운림산방), “가슴에 우주를 품는다”(충남 예산의 추사 김정희
    고택), “사람 보는 눈이 다르다”(전북 익산 표옹 송영구 고택),
    “인간답게 살아라”(강릉 선교장)… 공직을 빙자해 받은 뇌물로
    재산을 불리고, 투기로 축재하는 ‘졸부’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요즘이기에 옛 명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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