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元老의 誤判

      입력 : 2004.03.05 17:26 | 수정 : 2004.03.05 17:26

      송호근·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1865~1945), 개화의 선구자이자 일본·중국·미국에 유학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고종 때 외무협판을 지내고, 동생 윤치소와 함께 경성신문을 창간한 언론인, YMCA 원장, 그리고 훗날 연희전문 이사를 지낸 한국 기독교계의 거물.

      그는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의 회장을 역임한 민족의 원로였다. 윤치호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년 동안 자신이 겪은 일을 영문일기로 꼼꼼히 적었다.(국사편찬위원회, ‘윤치호 일기’)

      1919년 3월 1일, 그는 고종 황제 승하로 뒤숭숭해진 민심을 의식하며 지금의 종로 2가에 위치한 YMCA 건물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달포 전, 육당(六堂) 최남선이 찾아와 조선독립을 위해 모종의 행동을 취하자는 권유를 뿌리친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독립을 원치 않아서가 아니라, 국부와 능력을 배양하지 않고서는 강대국들이 조선의 독립 따위를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육과 경제, 그것이 윤치호에게는 독립의 지름길이었다.

      점심을 마친 윤치호는 갑자기 창문 밖이 소란스러워짐을 느꼈다. 파고다공원 쪽에서 만세소리가 빗발치고 시민들의 함성소리가 가득 밀려왔다. 소문으로 떠돌던 게 바로 저것이라고 직감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 광장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소년들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곧바로 군인, 기마경찰, 형사, 헌병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시내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였다.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는 매우 부실해 보였다.”(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 1916~1943’ 중 3월 1일자).

      30분 전, 독립을 고하는 한용운(韓龍雲)의 개회사가 끝나자마자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다.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문은 이미 전국에 배포된 상태였으며,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의 손에 곧 닥쳐올 고난의 징표처럼 쥐어져 있었다.

      “오등(吾等)은 자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권위를 영유케 하노라.” 당대 최고의 지식인 윤치호의 눈에는 한없이 부실해 보였던 독립선언문은 그렇게 비장한 언어로 침략자를 꾸짖고 있었다.

      기마경찰 앞에서 맨손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짓이었을 게다. 윤치호는 3월 2일자 일기에서 학생들의 소요는 무단통치를 연장시킬 뿐이라고 적었다.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월 3일, 고종(高宗)의 운구 앞에서 잠깐 눈물이 비쳤다. 그러나 장례의식과 애도행렬이 갖춰 입은 의상이 너무 유치하게 느껴져서, 이런 상태로 독립을 운운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었고, 급기야는 “대중목욕탕 하나 운영하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현대국가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감에 젖었다. 그는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3·1운동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민족 원로의 오판(誤判)이었다. 독립을 향한 지사(志士)들의 움직임은 국내외에서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며, 3·1운동이 다기화된 운동세력의 연합적 분출구였음을 윤치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는 한 달 앞서 일어난 동경유학생 독립선언식을 성사시키려고 동경과 상해를 밀사처럼 뛰어다녔으며,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한 여운형(呂運亨)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여 조선독립 호소문을 강대국 대표들에게 전달했다.

      연해주와 만주에서는 중광단(重光團)이라는 독립운동단체가 1919년 1월에 이미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미주(美洲)의 이승만과 안창호는 독립결의서를 미국정치인들에게 배포했고, 국내에서는 기독교·천도교·불교계의 연합전선이 결성되었다.

      독립선언문은 거사를 위해 점조직화된 학생들의 전국망을 따라 방방곡곡에 전달되었다. 그런데 윤치호는 이 사실을 몰랐다. “약자가 살 길은 힘을 기를 때까지 강자의 호감을 사는 것”임을 거듭 다짐해보지만, 그는 여전히 “동포들의 고통에 머리가 지근지근 아프다.”(3월 9일 자) 독립에 이르는 길이 달랐던 것인가, 윤치호는 33인 중 한 사람인 이승훈(李昇薰)의 결단을 로맨티스트 혁명가의 말로 받아들였다.

      “이천만이 단합하여 죽기를 기약하고 통일 의사를 발표하면, 당장 독립이 안 온다 해도 이것이 씨가 되어 열매를 거둘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이승훈의 말처럼, 3·1정신은 항일운동의 포자가 되어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강자의 논리 속에서 국력을 기르기에는 일제의 압박이 너무 치밀했던 탓인지 윤치호는 창씨개명과 내선일체론을 ‘조선인 평등대우론’으로 해석하기에 이르렀고, 1941년 총독부 중추원 고문직을 수락했다.

      (송호근·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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