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傳記, 키 169.7㎝…3代 9명이 독립운동

    입력 : 2004.07.20 17:45 | 수정 : 2004.07.20 17:45

    유관순 새 傳記 나와

    169.7㎝의 훤칠한 키. 뜨개질을 잘 해서 조카의 돌 선물로 모자를 만들어준 여성적 감수성. 감옥 안에서 고통받으면서도 집안이 독립운동으로 풍비박산되는 바람에 혼자 남은 동생을 걱정하는 형제애…. 3·1운동의 ‘상징’ 유관순(柳寬順·1902~1920) 열사의 삶을 좀더 실체적으로 밝히는 전기가 나왔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이정은 수석연구원(50)이 집필한 ‘유관순: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은 그동안 신화화됐던 유 열사의 짧은 생애를 각종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치밀하게 재구성했다. 유관순 열사의 전기는 ‘순국처녀 유관순전’(1948년·전영택)과 ‘타오르는 별’(1963년·박화성) 등 소설가가 쓴 두 편이 있지만, 학술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은 처음이다. 이씨는 이 전기에서 그동안 잘못 알려졌던 유관순의 출생과 사망일을 1902년 12월 16일, 1920년 9월 28일로 바로잡는 등 기본적인 사실을 확정했다.


    이번 전기의 가장 큰 특징은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을 개인의 영웅적 행동을 넘어서 3·1운동의 큰 맥락 속에서 접근한 점. 특히 유 열사의 고향인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가 1900년대 초에 미국 감리교의 선교 활동이 본격화됐고 민족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가 되어 국채보상운동·애국계몽운동·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관순·조병옥 같은 인물이 배출됐다는 것이다. 유관순 집안에서 3대에 걸쳐 9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온 것도 이런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이화학당 재학 시절의 유관순(뒷줄 오른쪽 끝). 바로 왼쪽은 사촌언니 유예도, 중앙은 지도교사였던 박인덕 선생이다.


    가족을 따라 지령리교회를 다니던 유관순이 13세 때 서울 이화학당의 보통과 2학년에 편입한 것은 여성 선교사인 샤프 앨리스(한국명 사애리시·史愛理施)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충청도 지역에서 선교와 교육 사업에 열성을 바치던 사애리시 부인은 총명했던 유관순과 사촌언니 유예도를 이화학당에 보냈다.

    3년 만에 보통과를 졸업한 유관순은 1918년 4월 고등과에 진학하였고, 학교 옆 정동제일교회를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유관순의 이화학당 동기인 보각 스님(속명 이정수·99세)은 “유관순과 친구들이 종이와 물감을 사다가 태극기 70여 장을 만들어 학교 곳곳에 붙인 일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의 선배들은 1학년생을 배제했지만 유관순은 담장을 넘어서 시위 대열에 참여했다. 유관순은 친구들에게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고향에 내려가 독립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고, 헤어지면서 “독립된 뒤에 만나자”고 다짐했다. ‘칙칙폭폭’하는 기차소리도 ‘대한독립’으로 들린다고 말할 정도로 독립 열망을 품었던 유관순은 고향에 돌아와 천안 일대의 만세 시위 준비에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의 만세 시위 때 유관순은 일본군의 무차별 발포로 부모님을 현장에서 잃고 본인과 오빠, 작은 아버지가 투옥되었다. 유관순은 이듬해 3·1운동 1주년 기념 옥중 시위를 주도했고,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느냐”며 상고를 포기했다.

    3년 형을 선고받은 유관순은 1920년 4월 특사로 형기의 절반만 복역하고 석방될 예정이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방광이 파열되고 이를 일제가 방치하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