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警에 쫓겼어도 유머 잃지않던 아버지

    입력 : 2004.09.06 19:24 | 수정 : 2004.09.06 19:24

    나영균 梨大명예교수, 항일운동가 나경석·화가 나혜석 등 ‘가족史’ 책으로

    책을 낸 나영균 교수
    총독부의 신상조사서 한 페이지.

    ‘성명:나경석. 인상특징:신장 5척3촌, 색 검음, 체격 중, 입이 큼. 처벌: 다이쇼 8년(1919) 경성지방법원에서 강도·살인미수, 보안법 위반에 의해 징역 3개월. 성품:집요. 다이쇼 4년 이래 사업에 종사했으나 실패. *** 등과 교를 맺어 주의자가 됨. 사상행동:공산주의자로 치열한 배일 사상을 소유하며 그 고취에 노력 중.’

    군더더기 없이 요약된 서류 한 장은 일제 강점기 한 지식인의 모습을 차갑게 파악하고 있다. 그가 어떤 성장 배경을 지녔고, 어떤 꿈을 품었으며, 무엇을 성취하려 하였는지는 의미가 없다. 식민지배자의 눈으로 볼 때 그는 그 사회의 ‘적’이자 ‘위험요소‘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남자에 대한 한 여성의 기억은 전혀 다르다.
    1928년 나혜석 '자화상'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일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상하게도 적개심이나 분노를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형사에게 밤낮으로 쫓긴 이야기, 러시아로 도망간 이야기, 부당한 일본당국의 처사에 항의하기 위해 당국자를 만난 이야기들을 여러 번 들었지만 그 어조는 언제나 담담하고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해학적인 것이었다.”

    나경석의 딸, 나영균 이화여대 영문과 명예교수가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황소자리)이란 책을 펴냈다. 일제하 사회주의자이자 항일운동가이기도 했던 아버지를 중심으로 당대의 지식인들의 모습을 그린 이 책에서 그는 ‘그 시절’의 한 장면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본다. “지금 우리는 감정에 일그러진 거울이 아니라 제대로 된 거울에 비치는 우리 모습을 찾아야 한다. 가감없는 자화상은 미래의 설계를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에 그렇다. 나 교수는 또 고모인 서양화가 나혜석의 마지막 모습도 뚜렷한 기억으로 밝혀두었다. ‘회색 승복을 입고지척거리며 비탈길을 올라가던 모습’을 통해 그는 식민지의 여성 선각자였던 나혜석이 이혼과 사회적 경멸로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을 기록한다.
    일제 강점기 한 지식인 가정의 초상.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저자의 고모인 나혜석, 고모부 김우영, 아버지 나경석, 작은고모 나지석. 가족의 친구였던 춘원 이광수의 부인이자 최초의 여성 개업의 허영숙(왼쪽 아래쪽부터 시계방향으로)이 함께했다.


    사회주의자였으며 동시에 사업가였던 나경석은 사회주의 계열로는 드물게 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 앞장섰다. 1910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나경석이 처음 들어간 곳은 일종의 예비학교인 정측영어학교. 이 학교는 이광수, 최남선, 신익희, 장덕수 등 일제 초창기 내로라던 재사(才士)들이 거쳐간 곳으로 그들과 자연스레 교분을 맺었다. 젊은 나경석의 눈에 비친 일본은 부러움 그 자체였다.

    공학을 공부한 나경석은 귀국해 친구인 인촌 김성수(金性洙)가 세우고 송진우(宋鎭禹)가 교장으로 있던 중앙학교에서 화학과 물리를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하다가 독립운동의 꿈을 접고 사업가로 변신한다. 딸이 기록한 아버지의 궤적은 이렇다. “해방 전 그는 일선에서 물러난 몸이었기 때문에 총독부의 주목대상에서 빠질 수가 있었다. 친구 이광수나 최남선, 송진우, 장덕수, 김활란 등 한국에 남아 있던 유명인사들이 모두 친일적인 연설에 강제동원되고 일본에 대한 충성과 학도병 지원을 권장하는 글을 발표하기를 강요당하는 동안 아버지는 무사할 수 있었다.”

    나 교수는 ‘친일 문제’를 비켜가지 않는다. “아버지는 춘원 이광수와 최남선 등 각별히 가까웠던 이들이 전쟁말기 친일로 돌아서는 것을 아픈 마음으로 지켜봤다”고 기억하는 그는 “해방과 더울어 겪어야 했던 세상의 전복은…남의 비판에 앞서 자신과 해결해야 할 내면의 문제였다”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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