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20세기는 야만의 시간이었다

    입력 : 2007.03.16 23:10 | 수정 : 2007.03.17 04:53

    진보와 야만
    클라이브 폰팅 지음 | 김현구 옮김 | 돌베개 | 712쪽 | 3만원


    20세기가 막 시작됐을 무렵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1차대전의 전화를 경험했고, 곧이어 일어난 러시아 혁명으로 내전의 고초를 겪어야
    했을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스탈린주의의 억압과 대규모 아사에 직면했을 것이다. 1941년까지 힘겹게 생존한 사람들은 20세기의 가장 극악한
    전쟁인 2차대전에 휘말려 강제노동과 대량살육 앞에 무방비로 노출됐을 것이다.

    그래도 또 살아남았다면 다시금 무자비한 공산체제하에서 신음했을 것이고, 여든이 넘도록 끈질기게 산 사람들은 체르노빌 핵 참사를 당했을
    것이다. 극단적인 예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책(원제 ‘Progress and Barbarism’)의 시각이다. 대처 총리 시절 국방부
    차관보를 지냈고 ‘녹색세계사’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영국 역사학자 폰팅(Ponting)은 “20세기의 세계사가 진보의 거대한 흐름이었다는 착각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방향은 서로 달랐으나 ‘서구 지성과 정치적 전통이 이성 위에 세워졌다’고 믿었던
    사람들, ‘제도들을 합목적적으로 건설할 인류 사회의 능력과 더 나은 미래’를 전망했던 사람들, 그 자유민주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 모두에게 던지는
    진지한 충고다.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보편적인 경험은 이 책의 주 독자층인 서구나 북미의 중산층의 경험이 아니라, 저개발 국가 농민들의 비참한
    삶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제가 ‘20세기의 역사’인 이 책의 구성은 무척 독특하다. 연대기적 서술을 철저히 회피하고
    문화사를 배제하는 대신 ‘사람들’ ‘생산’ ‘지구화’ ‘전쟁’ ‘독재’ ‘민주주의’ 같은 테마 별로 100년 동안의 복잡다단한 세계사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한 문단에서 수십 년의 세월이 교차하기 예사인 현란한 서술 방식이지만, 세계를 보는 분석틀은 이매뉴얼
    월러스틴(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을 그대로 빌어왔다. 세계는 서유럽과 북미, 일본으로 이뤄진 ‘중심부’ 국가들과 중심부를 위해
    원재료와 식량을 생산하는 수많은 ‘주변부’,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와 남·동유럽의 중소득국인 ‘반(半)주변부’로 구성돼 있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으로 세계를 보게 되면, 1·2차대전과 냉전, 소련의 붕괴가 현대 세계사의 중요한 장(章)이 된다는 보통 개론서들의 서구
    중심적 시각은 타당하지 않다. 더 많은 인구가 살았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929년의 대공황과 1949년의 중국 공산화와
    1973년의 오일쇼크가 훨씬 더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었다. 1945년에서 1991년까지의 역사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인 ‘냉전’으로
    보는 시각은, 저자에 따르면 길 가는 사람을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강제로 맞춘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억지스럽다.

    세상은
    그래서 어떻게 됐는가? 서기 2000년의 세계는 1900년보다 훨씬 더 불평등해졌다. 7억7000만 명이 충분한 식량을 얻지 못했고 매년
    1800만 명이 빈곤과 기아로 죽었다. 가장 부유한 20%가 세계 총 소득의 80% 이상을 차지했고, 가장 빈곤한 20%는 2%도 받지 못했다.
    중국에서 5000만 명이 자국 정부의 억압에 의해 죽고, 보스니아 내전에서 100만 명이 학살당하는 등 국가적 폭력과 제노사이드(대량 학살)도
    사라지지 않았다.

    20세기는 한 마디로 “한 줌의 소수(중심부)에게는 진보였지만 압도적 다수(주변부)에게는 야만이었”고, 그것은
    다음 수십 년 동안에도 마찬가지리라는 것이 이 책의 우울한 결론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자력에 의해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 지위가
    상승한 희귀한 예가 한국과 대만이었다는 서술이다. 그 경미한 예외가 만들어 낸 작은 전환이 우리 삶의 터전이라면, 21세기 한국에서 여전히
    ‘진보’와 ‘야만’의 요소가 혼재하는 모습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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