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눈이 멀 때 지혜의 빛이 찾아온다

    입력 : 2008.05.30 16:18 | 수정 : 2008.05.30 16:28

    책이여, 안녕!
    오에 겐자부로 장편소설|서은혜 옮김|청어람미디어ㅣ463쪽|1만2000원

    고대 그리스의 시인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한다"는 얄궂은 신탁(神託)의 굴레에 갇힌 사내 오이디푸스의 전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왕자로 태어났으나 패륜의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에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오이디푸스는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성장한다. 청년이 되자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길에서 만난 왕(아버지)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죽은 왕의 왕비(어머니)와 결혼해 자식까지 낳는다. 왕국에 역병이 돌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저주받은 운명에 괴로워하면서 스스로 두 눈을 뽑아버린다.

    현대 그리스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 비극을 인생의 세 가지 도정으로 색다르게 해석한다. 1단계: 인간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 모른다. 2단계: 자신에 대한 호기심을 풀려고 한다. 3단계: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지만, 그 순간 눈이 멀어버린다.

    "우리는 어두운 심연에서 와서 어두운 심연으로 끝나는데 두 심연 사이의 밝게 빛나는 중간지대를 삶이라고 한다"라고 카잔차키스는 말했다. 우리는 말년에 이르러 생의 진실을 깨닫지만, 그 진실의 빛이 너무 강렬해 우리 영혼의 눈이 멀어버린다는 것이다.

    일본 천황제와 군국주의 망령을 비판하면서 지식인의 양심을 대표하는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 조선일보 DB
    일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73)가 2005년 발표한 장편 《책이여, 안녕!》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어둠에 빠지기 직전 의식의 등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원숙한 영혼의 음성을 들려준다. 장편 《체인지링》(2000년), 《우울한 얼굴의 아이》(2002년)에 이은 3부작의 완결편이다. 3권 모두 우리말로 번역된 3부작의 주인공 고기토는 바로 작가 오에의 분신이다.

    생의 말년에 이르렀다고 자각하는 고기토는 러시아 작가 블라미디르 나보코프의 소설 《선물》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독서와 상상력으로 꾸려왔던 삶과의 이별을 앞둔 작가의 심정을 표현한다. "안녕, 나의 책이여! 죽어 마땅한 자의 눈처럼 상상했던 눈도 언젠가 감겨야만 하리니."(457쪽)

    그러나 이 소설은 달관과 체념의 노년문학이 아니다. 스톡홀름에서 상을 받은 유명 작가 고기토와 그의 고향 친구인 천재 건축가 시게루가 꾸미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두 사람은 핵을 소유한 강대국의 거대한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폭탄 테러를 꾸민다. '9.11테러  는 세계 대도시들의 도미노식 붕괴의 시작'(60쪽)이라며 다소 엉뚱한 상상에 빠진 건축가 시게루는 새로운 폭파 공법을 개발해 인터넷으로 유포함으로써, 핵무기를 지닌 국가에 대한 개인의 저항 능력을 높여 궁극적으로는 핵무기를 무력화하겠다는 것이다. 고기토의 임무는 그 과정을 소설로 옮기는 것이다.
    '개인의 반란'을 엉뚱하게 그린 이 소설에 대해 오에는 "자폭 테러는 반대한다. 소설가의 상상은 언제나 기괴한 일탈을 포함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가 이 소설에서 진심으로 시도한 것은, 50여 년 동안 창작 활동뿐만 아니라 반전평화운동에도 참여한 '지식인 작가'로서 자신의 인생을 총결산하면서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고기토와 시게루 2인조 주인공은 엘리엇의 시를 통해 자신들의 심경을 토로한다. "노인은 탐험가가 되어야 해/ 현세의 장소는 문제가 안 되지/ 우리는 조용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해야 해"(459쪽)라는 그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조용조용히 현실을 향해 일을 저지르려고 한다. 그것은 이번 생에서 다음 생으로 가는 탐험의 여정에 불과하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고기토의 입을 빌린 오에는 주로 그의 독서 편력을 통해 얻은 삶의 지혜를 조용조용히 독자들에게 속삭이는 현자(賢者)의 풍모를 보여준다. 도쿄대 불문과 학생 시절 읽었던 프랑스 작가 피에르 가스카르의 소설집 《짐승들·사자(死者)의 시간》을 읽고 느꼈던 감동의 충격을 되살린다. 그 책에 실린 중편 〈개와 늑대의 시간〉에는 특수복장을 입고서 군용견들에게 물리는 마네킹 역할을 묵묵히 성실하게 수행하는 남자가 나온다. 오에는 그 사내의 존재에서 '양심의 의무를 다하는 인간의 초상'을 발견한다. "그의 의식에서는 '효과적으로, 참을성 있게, 매일 매일, 현재와 다가올 시대의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없어져 버리지 않도록, 맡은 역할을 해나가려고 하고 있는 거라네."(235쪽)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반대하는 오에는 태평양 전쟁 중 오키나와 양민의 집단 자결을 일본군이 강요했다고 썼다가 우익단체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발 당했지만, 최근 법정에서 최종 승리를 거뒀다. 뉴욕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내 나이 75세가 넘으면 소설가로서 더 이상 쓸 거리가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며 현재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서 제목을 따온 신작 장편 《익사·Death by water》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천황제를 지지하는 구세대 남성과 '일본의 모든 것'을 거부하면서 천황제를 무너뜨리려는 신세대 여성을 대비시킨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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