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유토피아를 만드나 꿈 있는 자? 富 있는 자!"

    입력 : 2011.03.14 03:02

    '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펴낸 美 랄프 네이더
    60년대 소비자운동의 기수… 大選 4차례 출마한 풍운아
    "정의 구현에는 돈이 필요… 부자만이 사회변화 이끌어"

    1960년대 미 소비자운동의 기수, 1990년대 이후 네 차례 대선주자로 나섰던 정객…. 미 정계의 영원한 아웃사이더 랄프 네이더(77)가 두툼하고도 엉뚱한 책 한 권을 내놨다. 미국에서 2009년 발간된 이 책 제목은 '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꾸리에, 544쪽).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서민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을 본 '오마하의 현인' 억만장자 워런 버핏이 2006년 1월 하와이의 한 고급 호텔에 투자자 조지 소로스, CNN 창업자 테드 터너, 배우이자 사회사업가 폴 뉴먼, IT 재벌 로스 페로, 전위예술가 오노 요코, 코미디언 빌 코스비 등 평균 79세, 17명의 거물을 모아 '국가 대전환 프로젝트'에 착수한다는 내용이다. 책 속에서 이들은 대기업에 포획된 금권정치 구조를 하나하나 타파하고 시민 참여를 북돋워 마침내 공동체 가치를 구현하는 법안을 만들어내는 등 나라를 바꿔버린다는 유쾌한 반란극이다. 등장인물은 실명이지만 내용은 픽션이다.

    저자인 랄프 네이터는 지난 10일 전화 인터뷰를 통해 "소설 속 세상은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이며 책은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는 소설적 비전을 담았다"고 했다. 테네시주 녹스빌에서 '민주주의의 쇠락'을 주제로 강연을 끝낸 직후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평생 대기업에 맞서온 당신이 갑부들을 '구세주'로 설정한 것은 의외다.

    "2004년 대선에 출마했다가 정의를 구현할 전통적 방법이 다 막혔음을 알았다. 정당, 법원, 노조, 미디어까지 기대할 게 없어 국민들은 자포자기 상태다. 새로운 상상력의 창을 열어 보이기로 했다. 연로한 억만장자들이 재산과 영향력을 활용해 워싱턴DC에 똬리 튼 대기업과 그 동맹을 물리치는 데 나서면 어떨까. 이 전제만 받아들여진다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새로운 사회 개혁의 시나리오다."

    ―금권정치를 타파한다면서 해법을 슈퍼리치한테서 찾는 것은 모순 아닌가.

    "정의를 구현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게다가 워런 버핏, 테드 터너, 오노 요코 등 상이한 경험과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 모이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내 책에서 부자들은 노동자, 서민을 조직화한다. 미국 역사에는 부자들이 사회적 대의에 봉사한 선례가 있다. 부자들이 보스턴에서 노예 해방에 나섰고 환경운동과 민권운동도 지지했다. 부자들을 '100% 반동'이라고 배격해서는 안 된다. 소수의 뜻있는 부자들을 찾아내 기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청년 갑부는 왜 빠졌나?

    "젊은 부자들은 CEO가 되거나 자기 사업을 불리는 데 더 관심이 많다. 70·80대같이 삶의 후반에서나 가질 수 있는 지혜나 경륜, 철학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꾸리에 제공
    ―유명 인사가 실명으로 등장하는데 양해를 구했나?

    "그들의 배경과 성취, 평소의 언행을 토대로 내용을 기술했다. 등장인물 중 절반은 개인적으로 안다. 버핏은 오마하의 주주총회에 초청해 내 책을 소개할 정도로 좋아했다. 이 책이 버핏과 빌 게이츠의 '재산 기부 서약(Giving Pledge)' 프로젝트에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사회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자선보다 정의의 실현이다. 앞으로 더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당신의 지향점을 '부자를 통한 사회주의 구현'으로 이해해도 되나?

    "정의와 형평성을 위한 캠페인이지 경직된 이념 캠페인이 아니다. 시민을 깨우고 활성화시켜 정치 참여를 독려해 해법을 찾아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반(反)시장주의가 아니라 '경쟁적 시장'을 추구한다. 나쁜 시장주의자를 몰아내고 기업 범죄를 추방하자는 것이다. 대기업이 맘대로 사용하는 공유지나 공중파 같은 공공 자산을 주인에게 되돌려주자는 거다. 지금의 정치는 돈에 포획되어 있다. 사회주의 역시 권력 집중이 문제다. 해법은 권력을 다수에게로 이전하는 것이다. 깨끗한 선거 프로젝트 같은 것을 책에 소개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 슈퍼리치가 정치활동에 나설 가능성은?

    "다음 대선에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이 무소속 후보로 나서면 아마 양당 독재구도가 흔들릴 것이다. 더 많은 슈퍼리치가 출마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패하더라도 여러 문제를 공론화시킬 수 있을 거다."

    한국 슈퍼리치에게도 들려줄 말이 있다면?

    "한국도 부의 집중으로 인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안다. 한국의 60~80대 슈퍼리치도 내 책을 읽으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버핏과 게이츠는 몇 달 전 중국에 가서 억만장자들과 이야기했다. 아마 한국에도 갈 것이다. 슈퍼리치는 슈퍼리치에게 말하는 법을 안다. 노인이 되면 철학적이 되고 유업(遺業·legacy)을 생각하게 된다. 이들 중 1%만 나서도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 랄프 네이더는

    미국 코네티컷주에서 레바논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소비자운동으로 유명해졌다. 미국 대선에 녹색당으로 두 번, 무소속으로 두 번 출마해 모두 떨어졌다. 라이프지(誌)는 그를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미국인 100명’ 중 한 명으로 꼽았지만, 정계 입문에 대한 욕심, 정부 개입 촉구는 비판을 받는다. 미국 자동차산업을 비판한 ‘Unsafe at any speed’는 유명한 저서. 아직까지는 독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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