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100개나 있는데 왜 복도에…

    입력 : 2011.03.19 03:01

    "역사의 태반은 쩨쩨한 일상… 모든 역사는 누군가의 집에서 끝난다"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박중서 옮김|까치|568쪽|2만5000원

    미국 출신 세계적인 작가 빌 브라이슨이 영국 시골에 고택을 샀다. 빅토리아 여왕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1851년) 서까래를 올린 의젓한 집이다. 어느 날 천장에서 물이 새 낑낑대며 다락에 올라가 보니 용도불명의 문이 하나 나왔다. 문은 지붕 밑 좁은 공간으로 이어졌고, 거기서 굽어보는 주변 풍경은 늘 보던 풍경과 미묘하게 달라 불현듯 브라이슨을 설레게 했다.

    그는 은근히 흥분했다. 여름날 담쟁이가 덩굴 뻗듯, 도처에 있는 만물의 내력이 한꺼번에 궁금해졌다. 이 집을 지은 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먹고 마시고 소비했을까? 따지고 보면 누구의 인생이건 기억할 만한 하루보다 일없이 흘러간 하루가 더 많다. 역사 속의 장삼이사들은 태평한 하루하루를 어떻게 소모했을까?

    이 책은 전작 '거의 모든 것의 역사'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확보한 브라이슨이 자기가 사들인 고택을 입구부터 다락까지 꼼꼼히 둘러보면서, 각각의 공간에 얽힌 일상의 역사를 탐구한 기록이다. 


    홀(현관)…  역사를 통틀어 홀처럼 위상이 추락한 공간이 없다. 중세까지 대개의 주택은 사실상 '원룸'이었다. 가장부터 하인까지 온 식구가 홀 복판에 놓인 노출형 화로를 에워싸고 식사부터 취침까지 일상 대소사를 다 함께 했다.

    빌 브라이슨은 인문학과 과학을 종횡무진 넘나들며‘이런 정보를 어떻게 찾았나’싶은 디테일로 독자를 웃겼다 경악시켰다 한다. 이번엔 집으로 본 사생활의 역사다.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14세기에 굴뚝이 개발됐다. 난방과 환기가 해결된 것이다. 화로는 가고 벽난로가 떴다. 비로소 대들보 위에 판자를 걸칠 수 있게 됐다. '2층의 탄생'은 공간의 분화를 촉발했다. 침실·서재·응접실·탈의실과 함께 사실(私室·privy chamber), 즉 실내변소가 나타났다. 영국인도 한국인처럼 이 공간을 '해우소'(place of easement)라 불렀다. 국왕을 자문하는 '추밀원'(Privy Council)이 변기 시중에서 유래했다는 얘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강력한 낭설이다. 방이 늘면서 집은 커지고 홀은 쪼그라들어 오늘날의 현관이 됐다.


    부엌 식당… 신대륙 발견 전까지 유럽인은 설탕 없는 케이크, 토마토 없는 스파게티, 케첩 없는 햄버거를 먹었다.

    식탁이 다채로워졌다고 누구 입에나 같은 혜택이 들어간 건 아니었다. 향신료·커피·설탕은 상류층, 감자는 하류층 입으로 들어갔다. 하인들은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오늘날 세탁기·청소기·다리미·수세식 변기가 하는 일을 몸으로 했다. 요리하는 공간(kitchen)·먹는 공간(dining room)·설거지하는 공간(scullery)이 뚝뚝 떨어져 있어 잘사는 집 하인과 못사는 집 주부의 고통을 더했다.

    요리가 늘면서 나이프와 포크의 수와 종류도 덩달아 늘었다. 그럴수록 식탁 매너는 까다로워졌다. 코스에 따라 차례차례 음식을 내놓는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 등장한 '신풍속'이다. 그전까지 영국인도 우리처럼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차려놓고 먹었다.


    침실… 셰익스피어 시대에 어엿한 차양 침대를 하나 사려면 학교 선생 반년 치 봉급이 들어갔다. 사람들은 "귀한 손님을 모신다"는 명목으로 가장 좋은 침대를 거실에 전시하고 본인들은 허술한 침대에서 잤다. 셰익스피어는 "내가 가진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아내에게 남긴다"는 유언장을 썼다. 부인에게 정신적인 따귀를 갈겼다는 통설과 달리 "추억이 깃든 침대를 오롯이 당신이 간직해달라"는 달달한 메시지였을 수 있다.


    화장실… 로마제국 몰락 후 17세기까지 유럽인은 죽어라고 안 씻었다. 땀구멍으로 몸에 해로운 공기가 들어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여왕도 한 달에 한 번 머리를 감았다. 유럽인과 처음 맞닥뜨린 아메리카인들은 맨 먼저 냄새에 기겁하고, 고운 천에 코를 푼 뒤 소중하게 호주머니에 넣는 습관에 또다시 경악했다.

    배설의 변천사는 이보다 끔찍하다. 프랑스 왕실은 1715년 베르사이유 궁전 거주자들에게 "매주 1회 복도에 쌓인 배설물을 치우라"는 칙령을 포고했다. 궁전 안에 화장실이 100개나 있는데도 사람들이 웬일인지 복도와 정원을 선호한 탓이다. 영미권에는 숙박객이 여관 주인에게 "요강을 달라"고 청하자 여관 주인이 "내일 아침 전에 돌려달라"며 솥을 내줬다는 사료가 도처에 있다.

    산업혁명의 최대 피해자들 중 하나는 과밀해진 런던에서 변기를 푸던 일꾼들이었다. 분뇨 구덩이 뚜껑을 열자마자 독가스가 대포알처럼 고인을 강타했다.

    인간은 극히 최근에 깨끗해졌다. 18세기 이후 서서히 목욕이 일반화됐다. 19세기 중반 런던에서 열린 대박람회에는 700종의 비누와 향수가 출품됐다. 줄잡아 80만명이 수세식 변기라는 기적을 줄 서서 목도했다.


    브라이슨은 다시 다락에 올라와 책을 맺는다. 브라이슨이 사는 집을 지은 사람은 토머스 마셤이라는 유복한 총각 목사였다. 19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농업이 쇠퇴하고 상속세가 도입됐다. 영국 지주와 성직자는 속수무책 몰락했다. 파죽지세로 흥기하던 미국 갑부들이 유럽 귀족들이 내놓은 골동품을 궤짝으로 사들여 요즘 한국 관광객이 많이 가는 여러 박물관을 채웠다.

    브라이슨의 펜 끝을 따라 여기까지 읽고 나면 누구나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 각자가 누워 있는 방의 역사는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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