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노예로 만든 그… 나는 절대 '주인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입력 : 2011.09.17 03:05

    납치범의 노예로 10대 도둑맞은 그녀… 납치부터 탈출까지 8년 6개월의 자전적 기록

    3096일

    나타샤 캄푸쉬 지음|박민숙 옮김 | 은행나무|304쪽|1만2000원

    2006년 8월 세계 언론들은 영구미제가 될 뻔한 납치사건이 해결됐다고 보도했다. 1998년 오스트리아 에서 당시 열 살 소녀가 흔적 없이 사라진 지 8년 만에 나타난 것이다. 나타샤 캄푸쉬. 무려 3096일 동안 납치범의 지하실에서 노예처럼 살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소녀의 이름이다. 세상은 처음엔 동정, 다음엔 야릇한 호기심, 그리고 편견으로 바라봤다. 탈출 4년이 된 작년, 소녀가 1998년 3월 2일부터 2006년 8월 23일까지 감금됐던 자신의 체험을 정리한 '3096일'을 펴냈다. 납치범과 소녀,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비구도 등 '뻔할 것'이라는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 처참함은 영화 '빠삐용'을 연상케 한다. 너무 일찍 음습한 인간심리와 상호모순된 감정, 덧없는 인심을 알아버린 한 소녀의 빼앗긴 삶에 가슴이 쓰리고, 진실과 대면하는 것은 지극히 불편하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넘길 때쯤이면, 인간의 생존욕망이란 또 다른 아름다움이 보인다.

    1998년 3월 2일 납치돼 2006년 8월 23일 탈출할 때까지 3096일 동안 감금돼 노예상태로 지냈던 오스트리아의 나타샤 캄푸쉬. 그녀는“감금된 동안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범인이었다. 범인과 함께하는 식사시간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기도 했다”며“그런 상황은 지금까지 현실에서 경험했던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극도의 부조리한 상황이었다”고 말한다. /은행나무 제공
    ◆납치

    "내가 눈을 내리깔고 그 남자를 지나쳐 가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그는 내 허리를 붙잡고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열려 있던 차 문 안으로 집어넣었다. 마치 우리가 함께 연습이라도 했던 양, 연출된 장면처럼 모든 것이 한 동작에 이루어졌다. 충격의 안무."(45쪽)

    열 살의 나타샤는 늘 엄마가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게 창피했다. 몇달 동안 혼자 가겠다고 졸랐지만 엄마는 무시했고, 1998년 3월 2일 나타샤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허락받지 않고 집을 나섰다. 바로 그날 사건은 벌어졌다. 당시 유럽에선 성도착자들에 의한 어린이 납치·살해사건이 빈발해 다들 긴장하던 때였다. 그날 아침 소녀는 현관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겠어?"

    ◆145㎝·45㎏→157㎝·38㎏

    2.7m×1.8m짜리 지하감방에서 보낸 8년은 지옥이었고 그녀의 10대는 그 안에서 증발됐다. 히틀러를 신봉하는 범인은 친구 하나 없는 대인관계 장애를 가진 정신이상자. "강간하지 않는다"는 그는 대신 "노예를 원한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그는 나타샤에게 원하는 것을 줬고, 빼앗았다. 음식과 낡은 컴퓨터, TV와 비디오, 라디오, 동화책 그리고 불빛을 줬다가 빼앗으며 서서히 노예로 만들었다. "내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바로 그 남자가 내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사실이 희한하게 느껴졌다."(67쪽) 지하감방에서 초경을 겪고 사춘기를 거치며 나타샤가 성장하자 범인은 식사량을 통제했다. 굶주린 나타샤가 바닥에 떨어진 음식조각을 입에 넣자 먹은 걸 토할 때까지 목을 짓눌렀다. 당근 몇개로 며칠을 버틴 적도 있다. 8년간 목욕한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수사기관의 DNA 검사를 의식한 범인은 나타샤의 머리카락도 깎아버렸다. '상벌(賞罰)'은 범인 마음대로였다. "육체적 감옥은 점점 심리적인 감옥으로 대체되었고, 그 장벽은 차츰 더 높아졌다. 그리고 나는 심리적 감옥을 지어준 간수에게 감사하기 시작했다."(155쪽) 납치 당시 약간 뚱뚱했던 나타샤는 비쩍 마르고 온통 상처투성이에 머리를 삭발한 몰골이 됐다. 버틸 힘은 있었다. 범인은 자신을 '주인님' '통치자'라고 부르라 했고 '무릎을 꿇으라'했다. 다른 모든 것에 굴복한 나타샤이지만 이런 요구엔 버텼다. "때로는 굴복해 버리는 게 더 수월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억압당하고 범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흥정할 수 있는 마지막 여지는 남겨 놓아야 했다."(193쪽) 범인에 대한 마지막 저항은 역설적으로 '용서'였다.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하는 일뿐이었다. 용서 행위를 통해 나는 내가 경험한 것들에 대한 힘을 다시 얻을 수 있었고,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 또한 가능해졌다."(194쪽)

    나타샤가 8년간 갇혀 지낸 곳은 엄마 집에서 18㎞ 떨어진 곳이었다. "차로 25분 거리. 현실세계에서의 거리는 나의 미친 세상에서는 이미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125쪽)

    캄푸쉬의 탈출을 보도한 2006년 8월 26일자 조선일보 지면. (왼쪽)

    ◆탈출

    '18세가 되면 독립한다.' 나타샤는 납치 전에도 이런 꿈을 꿨다. 그 꿈은 기적처럼 이뤄졌다. 2006년 8월 23일, 집 마당에서 나타샤는 진공청소기로 자동차를 청소하고 있었고, 납치범에겐 전화가 걸려왔다. 청소기 소리로 휴대전화가 잘 들리지 않자, 범인이 다른 편으로 돌아섰다. 나타샤는 냅다 집 밖으로 달렸다. 사람이 있는 집을 발견하고 뛰어들어 살려달라고 했다. 할머니가 말했다. "왜 나한테 그러는 거예요?"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도 "그대로 있어. 손들어!" 하고 외쳤다. "새로운 자유를 이렇게 접하게 될 줄은 꿈도 꿔본 적이 없었다."(277쪽)

    ◆스톡홀름 신드롬? 두 번 죽이는 짓

    나타샤가 탈출하자 범인은 자살했다. 나타샤는 언론 인터뷰 등에서 "온갖 수난 속에서도 갇혀 있는 시간 동안 작지만 인간적인 순간도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자 세상은 그녀를 향해 인질들이 납치범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이른바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고 했다. 나타샤는 말한다. "그를 어두운 면뿐 아니라 밝은 면도 가진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에 나 또한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감금생활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인 나를 짧은 말 한마디로 두 번 피해자로 만들었다. 그들은 나를 가리켜 '스톡홀름 신드롬'일 뿐이라고 했다."(204쪽)

    ◆자유

    자유로운 세상에서 나타샤가 만난 건, 편견이라는 또 다른 독방이었다. "피해자를 향한 관심은 기만이다. 사람들은 피해자보다 월등한 위치라고 느낄 수 있을 때에만 피해자에게 애정을 보인다."(293쪽) 현재 23세인 나타샤는 그 사이 고교를 졸업하고 가족관계도 회복했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지하방의 감옥에서 살아남았고, 스스로 자유를 되찾았고, 쓰러지지 않고 똑바로 남았다. 이 책을 마치면서 이제 처음으로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 나는 자유다."(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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