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를 허무는 상상력 한 권

    입력 : 2011.09.17 03:05

    어떤 작위의 세계

    정영문 장편|문학과지성사|294쪽 | 1만1000원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연상되는 작가가 있다. 삶의 부조리와 인간 존재의 불안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던 프란츠 카프카(1883~1924). 매혹적인 차별성은 카프카의 코미디 버전이라는 점이다.

    "그는 갱 흉내를 내며 걸을 때도 약간 갱처럼, 그것도 흑인 갱처럼 걸었고, 바지도 통이 넓은 것을 팬티가 때로는 살짝, 때로는 심하게 드러나게 입었는데, 나는 그가 걷는 모습을 보며 진짜 갱이 아니니까 갱 흉내를 내며 걸을 때도 약간 갱처럼 걸을 수 있는 거야, 진짜 갱이라면 갱 흉내를 내지는 않을 거야,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10쪽)'그'는 전(前) 여자친구의 현(現) 남자친구다. 과거의 여자친구와 현재 멕시코계 갱으로 보이는 그녀의 남자친구, 그리고 '나'는 같은 집에서 체류 중이다. 이 작품에 전통적 기승전결이나 플롯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 스스로 '사나운 초록색 잠을 자는 무색의 관념들'이라고 명명한 뜬구름 같은 상상의 파도만 넘실댈 뿐. 효용이나 효율의 측면에서는 측량 자체가 불가능한 작품이지만, 세계의 무의미와 허무를 확신하는 어떤 예술적 세계관에는 열광과 환호를 수반하는 작품. 1996년 등단한 정영문(46)은 15년 넘게 "세계의 무의미에 예술의 무의미로 대결"(김태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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