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고 코 베이는 소비자들

    입력 : 2011.09.17 03:05

    테마 읽기| 속임수
    '고기 먹지 말라'가 '포화지방 덜 먹자'로 바뀐 까닭은

    식품정치

    매리언 네슬 지음|김정희 옮김|고려대출판부|661쪽|2만9000원

    '어떻게 건강에 좋은 것만 가려 먹나? 맛있는 것도 가끔은 먹어줘야지.' 기름기 좔좔 흐르고 달콤하며 짭짤한 가공음식에 스르륵 굴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신간 '식품정치'에 따르면 그다지 자책만 할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싸고 편리하게, 혀에 착착 감기는 맛난 가공식품이 넘쳐나는 환경에서 선택은 우리 스스로의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은 식품업계 공세에 밀려 정부가 제대로 업계를 규율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래서 '고기는 적게 먹고, 설탕·지방·알코올 섭취를 줄여야 한다'는 명쾌한 메시지 하나 제대로 전달 못해 국민 건강이 망가지도록 방치하는 현실이 미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거대 산업, 홍보, 로비, 정치권 매수, 압력 행사. 제 목소리 못 내는 전문가와 본래 역할을 잊어버린 정부. 진실로부터 소외되고 우롱당하는 소비자. 요약하고 보면 특별히 새로울 것 없는 미국발(發) 음모론 공식인데, 우리가 매일 먹는 식품조차 이 틀에 꼭 들어맞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엔 어쩔 수 없이 새삼스러운 분노와 실망, 걱정과 우려가 솟아난다. '식품회사나 담배회사나 전혀 다를 것 없다'(실제로 필립 모리스 같은 담배회사는 크래프트&밀러 등 식품 회사를 갖고 있다)고 일갈하는 저자는 사람을 '먹여 살리는' 식품이 치열한 산업이 되면서 어떻게 미국인 '건강을 죽이는' 구조의 한 중심축이 되고 말았는지를 방대한 자료를 꼼꼼히 차려놓고 한 꺼풀씩 벗겨 보여준다. 미국 뉴욕대 교수로 15년 이상 영양학, 식품학, 공공보건학을 강의했으며,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국(FDA) 영양정책 자문위원을 지내는 동안 직접 겪은 경험도 녹여냈다.

    1986년 그가 공공보건국에서 일할 때다. '외과의사의 영양과 건강 보고서'를 감수하면서 만성질환 예방을 위해 지방과 콜레스테롤, 소금과 당분, 알코올 섭취를 줄여야 한다는 문구를 넣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기를 적게 먹으라는 문구를 넣어서는 안 된다"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2년 후 발간된 보고서에는 고기 섭취를 줄이라는 경고는 '포화지방을 덜 섭취하자'로 대체됐다. 부정적인 경고는 긍정적인 문장으로 바뀌었으며 일반 국민들에겐 금방 와 닿지 않는 '포화지방'이란 말이 사용된 것이다. 육류업계 로비에 오히려 소비자만 헷갈리게 된다. 1968년 미국 상원에 설치된 맥거번 위원회의 경우는 식품관련 이익집단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는 실례다. 맥거번 위원회는 1977년 '더 적게 먹자'는 취지의 '미국인을 위한 식생활 목표'를 작성, 발표했다. 그러자 목장주, 양계업자, 설탕생산업체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결국 '하루 소금 섭취량을 3g에서 5g으로 상향 조정'하는 등 타협을 했지만 맥거번은 1980년 선거에서 낙선했다.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현재 미국인은 하루 에너지 필요량의 두 배가 넘는 양을 먹는다. 식품산업의 발달로 음식이 쓰레기가 될 정도로 넘쳐나게 된 탓이다. 한 사람이 먹는 양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식품업계 경쟁은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식품산업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엄청나게 우월한 제품으로 경쟁자를 따돌리거나, 조금이라도 더 먹게 만드는 것이다. '맛'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느라 온갖 감미료와 첨가물이 더해진다. 대신 자연 그대로의 식재료에 드는 비용은 생산 원가의 20%도 안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식품의 실제 영양 가치는 가늠할 길이 없다. 비만이 건강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 된 이 순간에도 1회분 용량은 커져만 간다. 용량을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은 미미하지만(식재료 비용은 생산 원가 20% 미만이니까), 비슷한 가격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주는 음식을 소비자는 선택하니까.

    무차별 광고도 빼놓을 수 없다. 어릴 적부터 입맛을 길들이기 위해 어린이를 타깃으로 한 광고를 하고, 학교를 파고들어 패스트푸드와 탄산음료를 판매한다. 심지어 분유가 모유를 능가하는 식품이라고 광고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식품정치에 대처하는 소비자의 자세는? '먹는 음식 갖고 장난치지 말라'는 일시적 분개에서 멈추지 말고 '포크 투표'를 열심히 하라고 저자는 말한다. 가급적 가공을 덜 한 식품, 각 지역에서 나는 제철 식품을 '찍고' 신선한 채소·과일에는 아낌없이 제값을 내라는 것이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품의 마케팅 중단을 요구하고, 학교 내 급식의 질을 높여 좋은 식품을 가릴 줄 알도록 일찍부터 가르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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