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역? 번듯한 제조업부터 키워라

    입력 : 2012.01.21 03:16

    국부 창출은 산업화에서 나와 15세기 영국 등 선진국이 갔던 길 '세계화' 말하면서 보호 정책 여전… 경제성장 추진력은 발명과 혁신

    부자 나라는 어떻게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나라는 왜 여전히 가난한가
    에릭 라이너트 지음|김병화 옮김|부키|500쪽|2만원

    긴 제목을 줄이면 '국부론(國富論)'이다. 고전 경제학의 대부 애덤 스미스도 이런 제목의 책(The Wealth of Nations)을 써서 고전이 됐다. '어떻게 하면 나라가 부유해질 수 있을까.' 국가가 출현한 이래로 숙명적인 화두였다. 저자는 1967년 고교 여름방학 때 초청방문한 가난한 페루 리마의 쓰레기 처리장 꼭대기에서 비슷한 질문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 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과 코넬대에서 숱한 경제학서를 읽고 세계 49개국을 현장 체험하며 얻은 답이 이 책이다. 결론은 '먼저 돈이 되는 산업을 일으켜라!'

    뭐가 돈이 되는지는 야구공과 골프공의 생산과정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야구공은 아직도 수작업에 의존한다. 여태껏 기계화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야구공의 주요 생산지는 아이티·코스타리카 등이다. 인건비가 싸고 야구 본고장 미국에 가까운 곳들이다. 공은 손으로 108번씩 꿰매야 하나가 완성된다. 그렇다 보니 1인이 만들 수 있는 양은 시간당 4개. 미국에서 야구공 소매가는 시간당 15달러인데 아이티 노동자 손에 떨어지는 돈은 시간당 30센트 선이다. 골프공도 그럴까. 아니다. 생산은 자동화한 지 오래다. 인건비 비중은 약 15%. 기술 개발이 더 중요하다. 이런 골프공 생산업체는 미국 내에 있다.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 공장의 임금은 시간당 14~16달러. 놀랍지 않은가. 공은 공인데 골프공 노동자의 소득은 야구공 노동자의 12~36배에 이른다. 이제 아이티의 가난과 미국의 부가 이해되는가.

    저자는 말한다. 개인이 잘살려면 고수익 직종을 택하듯, 국가도 고수익 산업을 육성하라. 농업이나 원자재 생산이 아닌, 제조·서비스업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 말이다.

    역사를 봐도 그렇다. 1485년 헨리 7세가 즉위했을 때 영국은 빈농국이었다. 왕은 양모 수출을 금하고 모직 공업은 보조금까지 줘서 키웠다. 산업화에 이은 해외 무역은 대영제국의 기반이 됐다. 그 뒤 다른 유럽 국가들의 부자 되기 비법도 한 가지였다. 원자재 수입-국내 공산품 제조-해외 판매였다. 1776년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도, 1860년대 메이지 유신을 이룬 일본도, 1960년대 신흥공업국 한국도 같은 길을 달려갔다.

    책은 주류 경제학의 '모범답안'이 틀렸다고 말한다. 그들은 뭐라고 했나. 비교 우위론에 입각한 자유 무역이었다. 어떤 나라든 하나를 특화해 서로 교역하면 다 잘살 수 있다는 논리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레나토 루지에로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은 "국가와 지역 간의 관계를 균등하게 해줄 국경 없는 경제의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고 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어떤가?

    세계 인구의 절반은 하루 2달러 미만의 생계비로 연명한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대부분은 지난 25년 사이 더 가난해졌다. 1970년 이후 수조달러어치의 개발 원조가 개도국들에 들어갔지만, 상당수는 실질 임금이 1970년대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저자는 '세계화론'의 위선을 지적한다. 워싱턴 컨센서스(세계은행 등이 지원 조건으로 시장 개방과 민영화 등을 주문)를 낳은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은 세계를 향해 "정부는 경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했지만 정작 시카고시(市)는 첨단 기술 산업에 수백만달러의 보조금을 댄다. 부국은 자기들이 따른 적이 없는 이론을 빈국에 강요한다는 것.

    /corbis·토픽이미지
    저자는 이런 불합리한 처방이 경제학의 '탈선'에서 비롯했다고 말한다. 경제학이 역사적 사실을 중시하는 경험과학의 길을 벗어나 수학적 완결성에 집착하는 수리 학문으로 전락한 결과다. 주류 경제학이 떠받드는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에 따르면, 부자 되기의 비결이자 빈곤의 해법은 비교 우위에 따른 분업과 전문화다. 그럴 경우 1957년 소련이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쐈을 때 미국은 소련에 우주 분야를 넘겨주고 농업에 전념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비교 우위'가 아니라 모방과 따라잡기 전략을 택했다. 이듬해 NASA를 세우고 결국 우주 산업에서도 역전했다. 어느 경우든 고품질(고가 첨단 제품)의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국가와 국민은 부유해지고, 저품질(저가 양산 제품) 활동에 머무르는 국가와 국민은 가난해진다.

    저자의 주장은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1789~1846)와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요세프 슘페터(1883~1950)에 기대고 있다. 리스트는 일찍이 국가 주도 산업화와 보호무역 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슘페터는 경제 성장의 동력이 균형을 깨는 발명과 혁신에 있다고 봤다.

    책의 내용은 낯설지 않다. 이미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2003)와 '나쁜 사마리아인들'(2007)을 통해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다. 학계에서 신중상주의론이라 불리는 담론이다.

    수학적 모델을 토대로 한 주류 신고전 경제학파에 눌려 있던 이들의 목소리가 최근 커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냉전 이후 득세했던 신자유주의가 금융위기와 양극화 등의 문제로 불신받게 되면서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답을 찾기 시작한 것. 주류 경제학계의 응전은 상대적으로 부진하다. 최소한 국내 출판계에서는 그렇다. 지금껏 나온 대응서로는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23가지'(북오션) 정도다. 한·미, 한·중 FTA가 현안으로 떠오른 지금 함께 읽고 곱씹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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