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에 납치된 미켈란젤로 구하기

    입력 : 2012.02.11 03:06

    '1000년 제국' 꿈꾼 히틀러… 총통 미술관 만들겠다며 목록 만들어 미술품들 약탈
    연합군 미술품 구출 전담반, 성모자상·반 고흐·고갱 등 미술품 추적과정 생생히 담아

    알타우세 소금광산 동굴에서 되찾은 베르메르의 ‘천문학자’. 현재는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모뉴먼츠 맨

    로버트 M. 에드셀·브랫 위터 지음|박중서 옮김
    뜨인돌|624쪽|3만3000원

    "(알타우세의 소금광산 속에서) 두 개의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반 에이크의 그림 속에서 성모 마리아가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519쪽)

    5년간 '납치, 감금'됐던 세계적 명화(名畵)는 이렇게 구출돼 귀가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또 다른 '이름 없는 영웅'들의 활약을 역동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른바 '모뉴먼츠 맨'. 정식 명칭이 '기념물, 미술품 그리고 기념품 전담반'인 연합군 부대원들이 때로는 목숨을 바쳐가면서 나치가 약탈한 세계적 미술품과 문화재를 구해내는 모험담을 박진감 있게 담았다. "13년간의 관심과 호기심, 9년간의 노력, 5년간의 집중적인 조사"라며 한국어판 '감사의 말'만 5쪽에 걸쳐 도움을 준 이들의 명단을 실을 정도로 생존자들을 인터뷰하고 방대한 자료를 뒤지며 심층취재한 땀방울이 느껴지는 수작 논픽션이다.

    문화재 전쟁, 2차대전

    제2차 세계대전은 '문화재 전쟁'이었다. 전쟁의 역사가 약탈의 역사이기는 하지만 나폴레옹전쟁 당시부터 문화재도 약탈 목록에 포함됐다. 이 때문에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서구 각국은 일제히 문화재 소개(疏開)에 몰두한다. '모나리자'를 비롯한 루브르박물관 소장품은 프랑스 남부로, 영국은 웨일스의 광산을 1년 동안 개조해 문화재 보관소로 만들었고, 소련은 에르미타주미술관 소장품 120만점을 시베리아로 대피시켰다. 이탈리아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에 벽돌로 봉분을 만들었다. 이렇게 조바심을 낸 이유는 히틀러가 미술품 '광팬'이었기 때문. 청년 시절 화가와 건축가의 꿈을 가졌던 히틀러는 1000년 제국을 그리며 오스트리아 린츠 인근에 거대한 예술 도시를 계획하고 있었다. 설계도만 6m에 달하는 이 도시의 핵심은 '총통 미술관'. 독일의 미술학자들은 전쟁 전부터 전 유럽을 돌며 약탈할 미술품 목록을 작성했으며 1940년 히틀러는 선전상 괴벨스에게 구체적 지침을 내렸다. "1500년 이후 독일에서 반출된 모든 작품,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혈통 예술가들의 모든 작품, 독일에서 위탁하거나 완성된 모든 작품 그리고 독일적인 양식으로 그려진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작품"(177쪽)이었다. 또한 '게르만적'이면 모두 압수대상이었다. 판단은 나치 마음대로였다. 게다가 괴벨스 역시 따로 제 주머니를 챙겼다. 루브르박물관 소장품처럼 세계적 유물은 차마 손대지 못했지만 벨기에처럼 약한 나라나 유대인들의 소장품은 마구잡이 노략질의 대상이 됐다.

    지금은 세계적 관광지로 꼽히는 독일의 노인슈반슈타인 성은 2차대전 당시 나치가 유럽 각국에서 약탈한 미술품·보석을 모아둔 창고였다. 사진은 1945년 연합군 ‘모뉴먼츠 맨’들이 노인슈반슈타인 성에서 미술품을 되찾은 모습. /뜨인돌 제공

    모뉴먼츠 맨의 등장

    1943년 연합군 산하에 13개국 350여명으로 구성된 '모뉴먼츠 맨'이란 부대가 창립된다. 이들의 본격적인 활약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나치가 서유럽에서 후퇴하면서 시작됐다. 모뉴먼츠 맨들은 연합군의 선봉에 섰음에도 늘 퇴각하는 나치가 한발 빨랐다. 벨기에 브뤼헤 대성당의 미켈란젤로 작품 '성모자상'이 그런 경우. 1944년 9월 16일 모뉴먼츠 맨인 밸푸어 소령이 이 성당에 도착했을 땐 이미 8일 전 나치가 이 작품을 빼돌린 후였다. 반 에이크의 걸작 '겐트 제단화' 역시 마찬가지. 벨기에가 프랑스로 피란시킨 이 작품은 프랑스 비시 정부의 동의하에 나치에게 넘겨졌다. 한번 나치에 넘어간 미술품들은 아무리 찾아도 행방이 묘연했다. 유대인 로스차일드 가문이 소장했던 베르메르의 '천문학자' 등 명화와 보석들도 마찬가지.

    20세기의 네로, 히틀러

    모뉴먼츠 맨들은 나치뿐 아니라 시간과 싸워야 했다. 히틀러는 전황이 불리해진 1945년 3월 도로, 교량 등 모든 기반 시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약탈 미술품 역시 언제 잿더미가 될지 모르는 상황. 동쪽에서는 소련군 '전리품 여단'이 진격해오고 있었다. 게다가 "만약 유명한 건물을 파괴하느냐 우리 병사들을 희생시키느냐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우리 병사의 생명이 월등히 중요하므로 그 건물을 반드시 없애야 한다"(88쪽)는 아이젠하워의 말에서 보듯이 당시는 전쟁 상황이었다. '문화재 우선'만을 고집할 수도 없었다.

    마음은 급하지만 미술품의 행방에 대한 단서는 짚단 속에서 바늘 찾기였다. 비전투요원이었지만 선봉은 위험했다. '성모자상'을 뒤쫓아 라인강 일대를 탐문하던 밸푸어는 클레페라는 도시에서 폭발사고로 전사했다. 크고 작은 성과가 이어졌다. 독일 지겐의 산악지대 창고에선 렘브란트, 반 다이크, 반 고흐, 고갱, 르누아르, 루벤스의 작품을 구해낼 수 있었다. 모뉴멘츠 맨들은 99%의 노력과 1%의 우연으로 마침내 미술품의 행방을 알아낸다. 오스트리아 산악지대인 알타우세의 소금광산과 '디즈니랜드'의 모델이 된 것으로 유명한 노인슈반슈타인 성(城)이 나치가 미술품을 은닉한 '2대 보물창고'라는 것을. 특히 알타우세 소금광산엔 '겐트 제단화'와 '성모자상' 그리고 '천문학자'가 있었다. 사실 이 소금광산은 미술품 보관엔 괜찮은 장소다. 소금이 습기를 흡수해 항상 습도가 65%, 기온 역시 4~6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1945년 4월 10일과 13일엔 이 광산에 나무상자 8개가 배달된다. 각각 500킬로그램짜리 폭탄이 든 상자다. 히틀러에 충성을 바친 지방장관은 "돌려주느니 없애겠다"며 폭탄을 장착한 것. 하지만 현장 요원이 폭파에 반대하고 통로만 파괴한 덕에 인류의 보물들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이 광산에서만 회화 6577점, 소묘·수채화 230점, 판화 954점, 조각 137점, 무기와 갑옷 129점 등 트럭 80대 분량이 쏟아져 나왔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