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을 부쉈더니… 기억과 정체성도 와르르

    입력 : 2012.02.11 03:06

    인도·보스니아… 전쟁·테러로 인해 파괴된 건축물들의 참상 직접 둘러봐
    "건축물 없애는 건 민족 자체의 말살"

    집단 기억의 파괴
    로버트 베번 지음|나현영 옮김|알마|396쪽|1만8000원

    기원전 600년 무렵 서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했던 카르타고는 인구 70만의 대도시였으나 로마군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됐다. 로마의 카르타고 섬멸은 '도시 학살'이라 불릴 만했다. BC 146년 제3차 포에니전쟁이 터져 로마가 쳐들어왔을 때 카르타고인들은 도시가 파괴되는 동안 그곳에서 16㎞ 정도 떨어진 곳으로 피신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싸우는 쪽을 택했고 끝내 자신들의 신전과 장엄한 원형 부두, 다층 주택단지와 성벽이 돌무더기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당대의 경제대국이었던 카르타고는 이렇게 역사에서 지워졌고, 카르타고의 언어·문화·종교는 산산조각이 나 파편으로만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폴란드 영토는 제3제국의 인간도살장이 되었다. 폴란드인 5명 중 1명이 죽었고 그중 절반은 유대인이었다. 1944년 8~10월 바르샤바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후 나치 정권의 2인자 하인리히 힘러는 "바르샤바, 폴란드 국가의 수도이자 두뇌이자 지성인 이곳은 지도에서 영영 사라질 것"이라고 공언했다. 700년에 걸친 건축 역사에 대한 조직적 파괴가 시작되었고 도시를 허물기 위해 특수 폭파부대가 파견됐다. 총 957곳의 역사 기념물 가운데 782곳이 완전히 무너졌고 141곳이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부피로 따지면 1억㎥에 이르는 건물들 중 약 7400만㎥가 사라진 셈이다. "만일 나치스가 1945년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폴란드의 우수한 건축 유산은 이 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을 게 틀림없다."

    신간 '집단 기억의 파괴'는 전쟁과 테러, 혁명적 새 질서의 수립 등의 이유로 파괴된 세계 건축 유산들의 참상을 드러낸다. "친숙한 사물을 모두 잃는다는 것, 즉 한 개인을 둘러싼 환경이 남김없이 파괴된다는 것은 그 사물들이 불러일으키는 기억으로부터 추방당해 방향감각을 상실함을 의미한다. 개개인의 집단 정체성과 이 정체성들의 견고한 연속성이 상실될 위험에 맞닥뜨리는 것이다."

    독일 드레스덴에 있는 프라우엔키르헤(성모 마리아 교회)가 1945년 2월 연합군의 공습으로 무너지기 전후의 모습. 1726~1743년 지어진 이 교회는 동독 정부에 의해 전쟁기념물로 보존되었다가 통일 후 재건되었다. /알마 제공
    영국 건축 잡지 '빌딩 디자인' 편집인 출신의 건축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인도에서 보스니아까지, 요르단강 서안에서 아일랜드까지 다수의 현장을 직접 둘러봤다. 저자는 "어떤 민족과 그 집단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물질을 말살하는 행위는 민족 자체를 말살하는 것과 불가피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서, 이를 건축물을 매개로 한 '문화청소(cultural cleansing)' 현상이라 부른다. "기념물이 적(敵)을 상징함은 물론, 기념물 자체도 적"이라는 얘기다.

    파괴의 규모 자체만 놓고 본다면 국가 주도의 테러와 보복은 비할 데 없이 압도적이다. 시리아의 철권통치자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은 반란을 일으킨 도시에서 잔인한 작전을 펼쳤다. 1980~1981년 수니파 '무슬림 형제단'이 정부 건물에 폭탄 테러를 가한 데 대한 보복으로 1982년 초 시리아 중부 도시 하마를 초토화한 것이다. 미사일이 도시 심장부를 강타하면서 모스크의 은빛 돔이 무너지고 사망자는 1만~2만명에 이르렀다.

    아프가니스탄 농민 출신의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의 만행도 빠질 수 없다. 2001년 3월, 높이 90m 암벽에 벽감(壁龕·벽면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공간)을 조성해 만든 각기 약 55m, 40m 높이의 석불이 다이너마이트로 산산이 부서졌다. 55m 불상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입불상(立佛像)으로 최소 1500년의 역사를 자랑했다. 이 파괴는 탈레반의 지배에 저항한 시아파 소수민족 하자라족을 인종청소하는 과정에서 일어났고 이들에게 석불은 자신들 지역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외에도 독재자 차우셰스쿠에 의해 파괴된 루마니아의 고도(古都) 부쿠레슈티,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붕괴된 두브로브니크의 항구 도시 등의 실상이 책에 담겨 있다. 저자는 이데올로기와 인종, 민족주의의 갈등으로 수많은 건축물이 지금도 파괴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20세기 이전의 역사가 21세기에 되풀이되지 않도록 국제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자유롭게 선택한 과거의 흔적들 틈에서, 사회 안의 이질성을 긍정적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다양한 흔적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충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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