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쪽짜리 이 책 600만명 죽였다

    입력 : 2012.09.22 03:19

    로마시대 쓰여진 소책자 '게르마니아' 끝없이 곡해·오독
    '우수한 게르만족' 신화 낳고 나치즘의 근거로까지 이용
    "사상은 바이러스와 비슷…인간의 정신을 복제·변형시켜"

    가장 위험한 책
    크리스토퍼 크레브스 지음|이시은 옮김|민음인|376쪽|1만7000원

    독일 나치가 수세에 몰린 1943년 가을. 이탈리아 예시의 한 빌라에 나치 친위대가 들이닥쳐 곳곳을 뒤졌다. 목표는 한 권의 고서적. 하지만 찾던 책은 다른 곳으로 옮겨진 뒤였다. '코덱스 아에시나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저작 '게르마니아'의 15세기 양피지 필사본이었다. 책을 찾지 못하자, 친위대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는 분통을 터뜨렸다. 약 2000년 전 고서의 사본은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1924년 9월 '게르마니아'를 처음 읽은 하인리히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 조상의 당당함, 순수함, 고귀함 등의 영광스러운 이미지에 넋을 잃었다. 우리는 다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가 말한 '우리 조상'은 '게르마니아'에 묘사된 부족, '게르만족'이었다. 훗날 나치 2인자가 된 그는 이 게르만족의 '순수 혈통'을 위해 미혼녀에겐 '검증받은' 아리안 남성과의 출산을 장려하고, 전쟁 영웅에게는 중혼(重婚)을 허용하려 했다.

    나치에게 '게르마니아'는 '바이블'이었고, 600만 명 대학살의 '근거'였다. 하지만 오독의 결과였다. 독일인으로 미국 하버드대학 고전학 교수로 있다가 최근 스탠퍼드대로 옮긴 저자가 자기 모국에서 진행된 '곡해'의 역사를 추적했다.

    ◇로마의 타락을 말하려했던 타키투스

    타키투스는 네로 황제(37~68년)의 폭정 속에서 청년기를 났다. 원로원에 진출한 후에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공포 정치에 시달렸다. 96년 마침내 폭군이 암살당하자 펜을 들었다. 그 결실이 '게르마니아'. '게르만 민족의 기원과 관습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민족지(誌)였다. 30쪽도 안 되는 소책자에서 게르만 지역 부족들을 묘사했다.

    "그곳(게르마니아)에서는 사치와 악덕과 타락을 경계했다.(…) 단순함이 도덕성을 높이고 유혹이 적다 보니 일탈할 기회도 적어, 간통 사건은 극히 드물었고, 있더라도 처벌이 극도로 가혹했다." "게르마니아의 여러 부족은 이민족과의 결혼으로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은 채로, 오로지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닮지 않은, 별개의 순수한 종족으로 존재한다."

    15세기에 발견된 궨코덱스 아에시나스궩. 타키투스의 저서 궨게르마니아궩의 유일한 양피지 필사본이다. /민음인 제공
    정작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이 산다는 라인강 근처에는 가 본 적도 없었다. 문헌 자료와 전언을 토대로 게르만족의 초상을 그렸던 것. 오히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타락한 로마였다. 북부 지역 '야만' 부족을 통해 로마인이 잃어버린 자유, 용기, 도덕성, 규율, 단순함 같은 미덕을 말하려 했다.

    ◇게르마니아 재발견과 독일민족의 탄생

    수백 년간 잊혔던 게르마니아는 1425년 말 독일의 한 수도원에서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다시 숨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기 '로마 고전 발굴 사냥'의 소득이었다.

    중세 시대만 해도 합스부르크 왕가나 바이에른 족보는 있어도 독일인의 계보란 없었다. 하지만 '게르마니아'는 상황을 바꿔놨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술탄에 맞서 독일인을 결집할 필요가 있었던 피콜로미니(1458년 교황 비오 2세에 즉위)에게'게르마니아'는 좋은 근거였다.

    16세기 독일 민족주의자들도 타키투스를 불러냈다. 종교개혁가 루터도 민족주의 정서를 게르마니아에서 찾았고, '법의 정신'을 쓴 몽테스키외도 게르마니아에서 독일 정신의 영감을 얻었다.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도 게르만족의 미덕과 독일 민족의 재건을 노래하려는 것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 와서 게르마니아는 '성전(聖典)'의 반열에 올랐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1권의 가제가 '게르만 혁명'이었다. 1936년에 통과된 '독일인 혈통 및 명예 수호법'에 따라 유대인과 독일인 간 결혼이 금지됐다.

    정작 나치 정권 지도부조차 '완벽한 아리아인'의 신체와는 거리가 멀었다. 힘러는 두개골이 길쭉해 보이도록 머리 양옆을 밀고 다녔다.

    나치가 망한 후에도 '게르만의 신화'는 가시지 않았다. 나치 유산을 비판한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조차 1979년 "예나 지금이나 독일인의 공감대에는 뭔가 진정한 게르만적 요소가 보존돼 있다"고 했다.

    한 권의 책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이토록 근거 없는 확신을 낳을 수 있는가. 저자는 지식의 '전염 병리학'으로 설명한다. "사상은 바이러스와 비슷하다. 인간의 정신을 숙주 삼아, 내용이나 형식을 복제하고 변형해 가다가, 한데 모이면 이데올로기를 형성한다." 결국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가 '가장 위험한 책'이 된 것도 원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한 역대 독자들의 '곡해와 오독'의 산물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꼼꼼한 문헌 해석과 고증을 토대로,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려 '민족주의 신화'라는 근대의 '환부'에 메스를 들이댄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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