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姓 '손' 지키려 일본인 아내의 성을 바꾼 남자

    입력 : 2012.09.29 03:14

    일본의 논픽션 작가 손정의 뿌리 되짚어
    그의 수완·근성 낳은 손씨 일가 생존기는 재일 교포 수난사였다

    손정의
    사노 신이치 지음|장은주 옮김|럭스미디어|464쪽|1만5000원

    '일본 최고 갑부' '일본의 스티브 잡스'라 불리는 손정의(孫正義·55)에 관한 책은 이미 포화 상태다. 국내에 나온 것만 10권이 넘는다. 하지만 저자는 "지금까지 손정의 전(傳)은 소프트뱅크의 성공을 기점으로 귀납적으로 청년 시절 손정의를 이야기한다"고 깎아내린다. 일본의 대표적 논픽션상인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과 '고단샤 논픽션상'을 수상한 저자가 택한 길은 그 반대 방향, 뿌리 더듬기다. 손정의의 열정과 근성이 대체 어디서 비롯하는지 '수상쩍음'을 그의 '피와 뼈의 이야기'에서 풀어보겠다고 나섰다. 집요하다. 손정의가 태어난 판자촌의 이웃들, 학창 시절 교사와 동창을 수소문하고, 손씨 일가의 고향인 대구와 경남 고성군까지 방문해 구술을 채집했다. 대한해협을 넘나든 손정의 3대의 애환사를 되살려낸 결론은 이렇다. 오늘날 일본의 미래를 좌우하게 된 이 별난 인물은 100년 전 고향에서 살길이 막혀 바다를 건넌 재일 한국인들이 진흙탕 같은 역경을 딛고 피워낸 연꽃 같은 결실이었다.

    진흙탕 같았던 선대의 생존기

    손정의는 1957년 규슈 사가현 도스역 인근 조선인 판자촌에서 났다. 재일 교포 2세 부모의 4형제 중 둘째. 동네 이름이 '무(無)번지'였다. 조모는 새벽부터 리어카를 끌고 음식 찌꺼기를 모아 돼지를 쳤고, 부친도 중학교를 마치고 밀주(密酒) 장사로 나섰다. 꼬마 손정의는 돼지 똥과 술지게미 냄새 속에서 책을 읽었다.

    손정의 일가는 소액 대출업에 이어 파친코업으로 가신을 불렸다. 부친의 사업 감각은 동물적이었다. 파친코 주차장에 유료 낚시터를 만들어 '붉은 잉어 낚으면 보너스 만엔'이라며 호객했다. 파친코로 잃은 손님은 낚시에서 따려 했고 보너스를 딴 손님은 다시 파친코로 갔다. 하지만 손씨 일가는 재산을 모으면서 다툼이 잦았다. 험난한 가족사는 재일 교포들의 수난사이기도 했다.

    손정의의 중학교 동창생이 찍은 사진. 중3 때 소풍 가서 당시 유행하던 ‘부르스 리’ 흉내를 내며 발차기를 하는 모습. 손정의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야 친구들에게 “사실 나는 재일 한국인이야”라고 털어놓는다. /럭스미디어 제공
    국적 차별의 트라우마

    손정의를 키운 것은 민족 차별의 트라우마였다. 유치원 시절 '조센진'이란 놀림과 함께 돌에 머리를 맞은 그는 국적을 숨겼다. 머리와 근성만은 대단했다. 스스로도 "평생을 걸고 정말 열심히 하면 상대가 누구든 반드시 앞지를 수 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만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엔 국적 차별이 앞길을 막을 거라 예감했다. 부친이 오랜 음주와 과로로 쓰러진 후 미국 유학을 택한 것도 '차별'을 우회하려는 방편이었다. 한국에는 한 번 가봤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인 1973년 할머니와 함께였다. "가보니 어찌나 좋던지, 전기도 없는 호롱불 속에서 정성껏 차린 맛깔난 음식으로 반겨 주셨어요. 이런 멋진 사람들이 있는 조국을 전 차별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쁜 부스럼 딱지가 몽땅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지요."

    그는 미국에 가서야 비로소 '손(孫)'이란 한국 성(姓)을 쓰기 시작했다. 1990년 일본에 귀화하면서 한국 성을 고집한 과정도 기발했다. 법무성은 줄곧 "'손'이라는 일본 성은 없으니 귀화하려면 일본식으로 바꿔라"고 했다. 손정의는 꾀를 냈다. 일본인 아내(오노 마사미)에게 성을 '손'으로 바꾸는 신청을 하게 했고, 뒤이어 아내의 바뀐 성을 근거로 자기 성을 '손'으로 유지한 채 귀화했다.

    타고난 사업가 기질

    사업가 기질은 부전자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부친이 찻집을 내자, 무료 커피로 손님을 모으면 딴 메뉴도 덩달아 팔릴 거라고 했다. UC버클리 경제학부 시절엔 '음성 부착 다국어 자동번역기'를 개발해 1억엔을 모았다. 그는 3·11 동일본 대지진 후엔 '반(反)원전' 자연 재생에너지의 기수를 자처했다.

    이런 손정의를 보며 저자는 "우리(일본인)는 왜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걸까" 묻는다. 그리고 "그건 일본인으로서는 거의 이룰 수 없는 이야기를 그의 궤적을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쓴다.

    저자의 시선은 꼭 장발장의 뒤를 캐는 자베르 형사 같다. 우리 입장에서는 손정의를 이야기하는 데 화자의 시선, 그러니까 '성공한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시선'에 신경이 간다. 가령 "고령화로 치닫는 우리 일본인은 어떻게 해서든 밑바닥에서부터 극복해 올라오려는, 실제로 그것을 실현한 손정의의 왕성한 에너지를 결국 질투하는 것"이라고 쓴 부분은 자기 실토로도 들린다.

    저자는 '스티브 잡스' 평전에 버금가게 썼다고 하지만 이 책을 '손정의 평전'의 완결판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언젠가 제대로 된 '손정의 평전'이 쓰이는 날 작가가 꼭 참고해야 할 '전사(前史)'를 담고 있는 책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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