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가장의 침대는 거실에 있었다

    입력 : 2012.09.29 03:14 | 수정 : 2012.09.29 06:20

    살림하는 여자들의 그림책
    베아트리스 퐁타넬 지음|심영아 옮김| 이봄|258쪽|2만7500원

    에드가 드가(1834~1917)의 작품 '목욕통'(1886년·아래 그림).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한 여인이 옷을 벗고 목욕통 안에 쭈그리고 앉아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 속에는 주전자·솔·물병 등이 곁에 놓여 있다. 대부분 관람객은 이 작품을 보면서 "목욕하고 있네" 하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시인·도상학자이며 주부인 저자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욕실이 대중화되기 전까지 여성들은 침대 옆 테이블 밑에 목욕통을 숨겨뒀다가 몸을 씻었다"고 욕실의 진화를 설명한다. "테이블 위에 보이는 물병으로 물을 따라가며, 최소한의 물과 큼직한 스펀지로 온몸을 씻기 위해서는, 용감하게 추위를 감수해야만 했다. 당시엔 머리는 감지 않는 대신 오랫동안 빗질을 했다"는 친절한 설명도 붙인다.

    이 책(원제 nos maisons·우리의 집)은 명화를 통해 길어올린 '중세부터 20세기까지의 인테리어 역사'다. 저자는 그림 속 여인들이 활동하는 공간에 돋보기를 들이댔다. 벽난로 앞에 앉아 추위를 녹이는 여인들, 반짝반짝 윤이 나는 그릇, 정성스레 빗질하는 여성의 뒷모습을 보며 침실과 부엌·실내장식·조명·창·방·식당·욕실 등 집의 역사를 풀었다. 그림과 함께 당대 분위기를 기록한 문헌과 문학작품을 중간 중간 인용하며 시대상의 변천을 들려준다. 익히 알고 있는 그림을 새로운 관점으로 분류해 엮어낸 한 편의 '생활문화사'. 한국말 제목이 적절하지 않은 것을 빼면, 꼭 한 권 소장하고 싶어지는 책이다.

    [욕실] 목욕은 1년에 한 번만

    17세기까지 유럽인은 지독하게 안 씻었다. 중세 유행하던 공중목욕탕은 페스트와 콜레라가 유행하면서 사라졌고 16세기엔 물이 오히려 병을 옮긴다고 의심받았다. 17세기엔 속옷 입는 관습이 생기면서 물로 몸을 씻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속옷만 정기적으로 갈아입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특권층도 1년에 한 번만 목욕을 했다.

    에셍의‘몸단장을 하는 젊은 여인’. 당시 여성들은‘목욕’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봄 제공

    벨기에 화가 프랑수아 에셍의 '몸단장을 하는 젊은 여인'(18세기). 욕실을 그리고 있지만 얼핏 보기에 규방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석에 작은 도자기 대야와 비데가 보인다. 당시 점잖은 사람들은 비데를 '자기로 만든 바이올린 케이스'라 부르기도 했다. 나무 받침대 위에 대야를 얹은 형태의 비데는 이탈리아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속 하녀는 고급 목재 다리가 달린 높은 비데를 뜨거운 물로 채우면서 옆의 소녀를 쫓고 있다.

    하지만 욕실이 보편화된 20세기 초까지도 여성들은 목욕통을 사용했다. 머리는 보통 1년에 4번만 감았다. 칫솔질이 대중화된 것은 20세기 후반의 일. 1900년 위생박람회에서 기능적이고 현대적인 미국식 욕실이 주목받았고, 1910년 이후 요즘처럼 타일을 바른 욕실이 탄생했다.

    [침실] '전시용 침대'에서 손님 맞은 부인들

    네덜란드 풍속화가 얀 스테인의 '옷을 입는 여인'(1663년). 방금 잠에서 깬 여인이 모피로 안을 댄 외투를 걸치고 침대에 걸터앉아 양말을 신고 있다. 17세기 유행한 알코브(벽을 파서 침대를 넣은 다음 커튼으로 가리는 양식) 침실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난방은 이 시대 집에서 가장 큰 숙제.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몸을 죄어오는 집안 추위와 싸우기 위해 최대한 많은 옷을 껴입었다.

    스테인의‘옷을 입는 여인’. 난방이 어려웠기 때문에 집에서도 옷을 껴입었다. /이봄 제공

    17세기까지 개인의 사생활은 만인 앞에 공개됐다. 한 방에 여러 개의 침대를 두고 주인과 하인, 부모와 아이들이 한 공간에서 잤다. 상류층도 마찬가지. 사교계 부인들은 '전시용 침대' 위에서 손님을 맞았다. 거실에서 자는 것은 가장(家長)의 특권.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은 집안의 통솔권과 동시에 거실의 잠자리를 물려받았다.

    침실 문이 닫힌 것은 18세기 프티 부르주아가 탄생하면서부터다. 이들의 꿈인 사교 공간 살롱의 탄생과 함께 침실은 비로소 은밀해졌다. 개인적인 공간은 훨씬 나중에야 생겼다. 19세기 후반,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제목처럼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됐다.

    [부엌] 귀부인도 손으로 먹었다

    프랑스 화가 니콜라 베르나르 레피시에의 작품 '아침 준비'(18세기). 젊은 여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화로에 요리를 하고 있다. 화로 안에는 숯불이 붉게 타는 중이다. 식재료로 양배추와 양파, 여인이 손에 쥐고 있는 베이컨 한 덩어리가 보인다. 당시 시골 요리에 쓰이는 재료는 이런 것들이 전부. 왼쪽의 삼각모를 쓴 남자는 봇짐장수로 보인다.

    레피시에의‘아침 준비’. 화려한 프랑스 요리는 궁중에서나 통하는 말이었다. /이봄 제공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요리를 한다는 것은 즉석에서 야영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바닥이나 의자 위에 채소들을 올려놓고 작은 화로에 그릇을 얹어 요리하는 게 전부였다. 여인들은 작은 화로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부엌은 텅 비어 있었다.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봇짐장수를 소리쳐 부르면 식자재를 구할 수 있었고, 집에 식량을 쌓아두는 일은 거의 없었다.

    19세기의 부르주아들은 부엌을 하녀들의 영역, 즉 더러운 곳이라 여겼다. 20세기 와서야 부엌이 첨단 기술의 전당으로 거듭난다. 식당이라는 독립 공간이 등장한 것도 19세기 일이다. 15세기 채색삽화를 보면 가장 부유한 집조차 그릇이나 수저가 많지 않았다. 16~17세기 지체 높은 귀족과 귀부인들도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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