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서의 진화… 감성까지 '가이드' 한다

    입력 : 2012.10.20 03:07

    1990년대 - '세계를 간다' 시리즈… 덩달아 패키지관광 붐
    2000년대 중반 - '밤도깨비 도쿄' 등 맛집·쇼핑 위주의 짧은 테마 코스 소개
    이제는 감성이다 - '작은 마을 탐방' 같은 명소 이외 장소 소개
    와인·빵집·막걸리… '맛' 주제라도 세분화

    '언젠가 한 번쯤, 스페인' '이탈리아 소도시 여행' '남미, 나를 만나기 위해 너에게로 갔다'….

    이번 주 교보문고 여행서적 매대에 전시된 책들이다. 알려진 명소 대신 작은 마을과 숨은 골목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스페인의 풍차 가득한 콘수에그라를 거닐며 고독을 즐기고, 이탈리아의 에리체 골목에서 대기의 향기를 마신다. 여행지의 정보보다 현지에서 느낀 감성을 전하는 여행 에세이들이다.

    여행서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꼭 가봐야 할 장소를 엮거나 맛집 코스를 소개하던 여행서에 '삶'과 '사람'이 들어왔다. 현지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사색을 길러낸 책들, 사람 냄새 충실한 여행서가 최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진화하는 여행서

    송민진(35)씨는 얼마 전 회사에 사표를 냈다. "여행에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찾겠다"는 그녀는 지난 7월 출간된 '이탈리아, 낭만 혹은 현실'(컬처그라퍼)을 읽으며 일정을 짜고 있다. 책은 이탈리아 반도의 북쪽 베네치아에서 시작해 남쪽 끝 시칠리아 섬에 이르는 1000㎞ 종단기. 여행작가인 저자는 베네치아 깊숙한 골목들을 누비고, 시칠리아 광장과 장터를 오가며 열정 넘치는 이탈리아인들과 부대낀다. 송씨는 "저자처럼 '사람에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는' 여행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 싶다"며 "책에 등장하는 소렌토의 친절한 민박집 주인, 타오르미나의 명물 로베르토 과자점 주인장을 만나보고 싶고, 피렌체 두오모 성당 꼭대기에 올라 그녀가 느낀 벅찬 감정을 맛보고 싶다"고 했다.

    이제는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가고, 무엇을 느끼느냐가 중요한 시대. 원경혜 시공사 비소설팀장은 "과거의 여행서가 최대한 많이 보고 저렴하게 즐기는 여행 정보 제공에 치중했다면 이제는 '가치' 중심 여행서가 트렌드"라며 "웬만한 여행 정보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책에서 색다른 지역이나 특화된 정보를 원한다"고 했다.

    '펑키 동남아'(시공사)엔 동남아시아의 속살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빈민가에서 만난 바바리맨과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만난 국숫집 아저씨, 왕족 생활을 버리고 검사로 활동하는 태국 '알파걸' 공주…. 지리학자인 저자는 17년 동안 동남아 각지를 돌아다니며 현지 사람들과 음식을 나눠 먹고 살을 부대끼며 '동남아의 진짜 삶'을 디테일하게 포착했다.

    출판 관계자들은 "책은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하기 때문에 여행서가 바뀐다는 것은 곧 여행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뜻"이라며 "패키지여행에서 자유여행으로, 다시 머무는 여행으로 변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명소 탐방→테마 기행→감성 가이드

    한국에 본격적인 여행서 시대가 열린 건 1990년대. 45권짜리 '세계를 간다' 시리즈가 시작이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율화로 물꼬가 트이면서 배낭여행과 동남아·유럽 패키지여행 붐이 시작됐다. 여러 나라를 묶은 '눈도장 찍기' 여행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여행서 1기' 시대로 '100배 즐기기' '자신만만 세계여행' 등의 시리즈가 인기를 끌었다. 길을 찾고, 명소를 보고, 쇼핑할 수 있는 단순 정보에 집중한 가이드북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테마 여행서들이 많이 나왔다. 같은 여행지라도 맛집, 쇼핑, 카페 등 한 가지 주제로 여행지를 엮어가는 스타일. 여성들이 선호하는 자유여행이나 도깨비 여행 등을 겨냥해 '금요일에 떠나는 상하이' '밤도깨비 도쿄' '데이즈 인 런던' 등이 쏟아져 나왔다. 짧은 시간에 최대한 도시를 즐기도록 최적의 여행 동선을 짜주거나 쇼핑 코스, 이색적인 소품 가게 등을 소개하는 데 중점을 뒀다.

    최근에는 '감성까지 가이드하는' 여행 에세이가 줄줄이 출간되고 있다. 고현진 알에치코리아 여행팀장은 "정통 가이드북에 에세이를 결합한 테마형 가이드북이 여행서의 한 장르로 자리를 굳혔다"며 "다만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고 감성을 나열한 정체불명의 에세이는 유명인사 필자가 아니면 성공하기 힘들어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동선이 확실하고 여행안내서의 틀, 즉 정보를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콘셉트 확실해야 읽힌다

    출판사들은 이미 유명 여행지의 식당과 명소는 다 훑은, 한마디로 '빠꼼이' 여행자들에게 책을 한 권 더 팔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2010년 출간된 '일본 소도시 여행'(시공사)은 최근 쏟아져 나오는 '작은 마을 탐방'류의 시작. 취향 까다로운 독자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그해에만 1만부가 팔렸다. 시공사는 지난해에 '이탈리아 소도시 여행', 올해 '스페인 소도시 여행'을 연이어 냈다.

    주제는 점점 좁고 다양해진다. 단순한 맛집 기행에서 와인·빵집·막걸리·서점·사찰 기행으로 분화되는 식이다. 같은 곳이라도 '탈것'에 따라 걷기·자전거·오토바이·버스·지하철 여행 안내서가 따로 나온다. 지난 5월 출간된 '엄마 딸 여행'(나무수)은 여성의 여행이라는 확실한 콘셉트로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예스24 여행담당 MD 김태희 대리는 "최근의 여행서들은 주로 여행을 통한 감성의 치유가 목적이고, 떠나지 못하는 독자들에겐 현실 도피라는 대리만족을 준다"고 했다.

    하지만 대다수 감성 여행서의 판매는 미미한 수준. 예스 24의 올해 여행서 판매 순위 1~10위는 여전히 정통 가이드북이 차지하고 있다. 1위 '클로즈업 홍콩', 3위 '클로즈업 오사카', 9위 '핵심유럽 100배 즐기기' 식이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감성 여행서는 주로 30대 여성들을 타깃으로 한 책들로 쏠려 있고 일기장을 훔쳐 읽는 것 정도의 수준에 머무른 것들이 많다"며 "다양한 세대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여행 이야기로 확장되어야 시장성도 생길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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