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구게는 어떻게 4억년 시간을 견뎠나

    입력 : 2012.11.10 03:08

    20분마다 한 종이 사라진다
    알 품어 부화시키는 개구리, 수억년 생존한 생물들 통해
    고대 생태계·종의 진화 등 '자연의 역사'를 파헤치다

    가장 오래 살아남은 것들을 향한 탐험

    피오트르 나스크레츠키 글·사진|지여울 옮김 | 글항아리|420쪽|5만원

    어떤 생(生)은 시간을 견뎌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장엄하다. 지름 10m에 높이 100m, 수령(樹齡) 2000살이 넘는 세쿼이아(sequoia) 나무를 우러러보며 느꼈던 숙연함은 이제 대수롭지 않은 감정이 되고 말았다. 이 책 속 생물들은 사진(500여점)만으로도 압도적이다. 억만 겁 세월을 지나온 '살아 있는 화석(化石)' 앞에서 말을 잃는다.

    4억4000만년을 이어온 '순례'

    할 수만 있다면 5~6월 미국 동부 델라웨어만(灣)에 가볼 일이다. 해가 질 때쯤 뭍으로 올라오는 아메리카 투구게(horseshoe crab) 수만 마리를 목격할 수 있다. 투구게는 4억4000만년 전 지구에 등장했고 산란(産卵)의 역사도 그만큼 길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일지도 모를 장관이 펼쳐지는 것이다.

    왼쪽 사진은 뉴기니 섬의 개구리. 잎사귀 뒷면에 알을 낳고, 수컷이 촉촉하게 끌어안아 지킨다. 작은 사진들은 ①코스타리카 열대우림에서 단물을 배출하는 꽃매미 ②미국 델라웨어에서 산란하러 뭍으로 오르는 투구게들 ③가장 오래 살아남은 종자식물의 속(屬)으로 꼽히는 은행 나무. /글항아리 제공
    우리에게 바닷속 깊고 어두운 투구게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그들에게도 인간 세상은 낯설고 불안할 것이다. 투구게는 물속에서보다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모래를 헤치며 아득바득 긴다. 암컷은 구덩이를 파고 수컷은 알의 아비가 되겠다며 쌈박질을 한다. 성체(成體)로 살아남을 확률은 보잘것없다. 암컷 한 마리가 알을 9만개 낳지만 그중 하나만 8~10년 생존하고 다시 이 해안을 찾는다.

    박물학자이자 사진작가인 저자는 이 산란 드라마를 종교 체험에 빗대며 "자연의 신비 앞에서 세상의 불행을 잊게 된다"고 썼다. 인간사가 사소해 보인다. 공룡이 왔다 사라지고 기후변화 등 숱한 변이가 휘몰아치는 동안 투구게는 살아남았다. 그들의 산란 행동은 중생대의 바다가 얼마나 위험한 곳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투구게의 딱딱한 등딱지를 통해 수억년 전 생명의 모습을 보는 셈이다.

    뉴기니 섬에는 올챙이가 없다

    2억5000만년 전 육지는 하나의 큰 덩어리였다. 대륙이 갈라지면서 조상과 격리된 동식물은 오랜 시간 뒤에 전혀 다른 종으로 진화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만 서식하는 생물종에서 우리는 그 결과를 본다.

    이 책은 고대 생태계의 일부를 간직한 곳을 찾아 잔존 생물과 마주한다. 탐사의 출발점은 뉴기니 섬. 몇 주간의 표본 채집으로 생물상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무모했지만 수확은 적지 않았다. 날개에 소리를 내는 구조가 없어 노래를 못 부르는 여치, 손톱보다 작은 개구리, 세상에서 가장 큰 나비…. 히말라야에서 해발 5500m에도 개미가 사는 것과 달리 뉴기니에서는 2000m만 넘어도 개미가 발견되지 않았다. 따뜻한 기후에 익숙해져 고산 지대 적응력을 키우지 못한 것이다.

    뉴기니의 개구리들은 올챙이 단계를 우회하는 전략을 진화시켰다. 지표수(地表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속에 알 수백 개를 낳고 스스로 살아남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습한 곳에 큰 알 몇 개를 낳고 부화할 때까지 부모 중 한쪽이 보살핀다.

    그들이 인간에게 묻는다

    진화적 관점에서 가장 성공한 새는 대머리독수리(세계 15만마리)가 아니라 닭(160억마리)이다. 그러나 닭이 천문학적 번식에 대한 대가로 종종 끔찍한 최후를 맞는 반면, 인간을 공짜로 실컷 이용하는 생물도 있다. 식물로는 은행나무가 대표적이다. 2억7000만년 전부터 존재한 은행나무는 오염과 질병에 강해 도시에서 살기 적합하다. 히로시마 원폭(原爆)에도 살아남았다는 사실로 보아 핵전쟁 이후 지구에 서 있을 유일한 나무가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생태계의 봉인(封印)을 뜯어내 보여주는 것 같다. 서아프리카의 아트와 공룡거미(고생대), 뉴질랜드 파충류 투아타라(중생대) 등 언제고 덜컥 사라질 수 있는 생물의 풍경을 그러모았다. 물론 과학도 아주 먼 과거로 가면 추측이 되지만 저자는 꼼꼼하고 친절하게 독자를 안내한다. 평평하게만 보았던 생물 뒤에 감춰진 긴 시간, 험난한 생존기를 담백하면서 재치 있는 화법으로 들려준다. 20분마다 한 종(種)이, 1년이면 2만6000여종이 지구에서 사라진다는 대목을 읽을 때 아득해진다. 인간은 종횡무진 지구를 망가뜨리고 있다. 진화론자이자 인류학자였던 로렌 아이슬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인류는 빙하가 떠돌던 와중에 생겨났다. 그들은 돌보다 연약하다." 원제 'RELICS: Travels in Nature's Time Mac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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