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과 결혼하겠다는 딸… 당신은 승낙할 수 있을까

    입력 : 2013.06.08 03:01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착각
    자기 집단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특정 집단을 불순하다고 낙인찍는 사회
    노예제부터 유대인 학살에 이르기까지 쉽고 다양하게 합리화돼 온 증오의 역사

    인종차별의 역사 표지 사진
    구매하기
    인종차별의 역사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지음|하정희 옮김
    예지|384쪽|2만3000원


    '당신은 인종차별주의자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무어라 대답할 것인가. 먼저 이 책의 저자인 프랑스 철학자 들라캉파뉴(1949~2007)가 들려주는 프랑스 사례를 읽어보자. A씨는 파리의 대중매체에 유대인이 지나치게 많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담배 가게를 운영하는 B부인은 딸이 흑인과 결혼만 하지 않는다면 흑인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다. 카페 주인 C씨는 아랍인과 이슬람교도 손님을 경계한다. 세 사례에 대해 '나라도 그럴 것'이라고 공감한다면 당신은 인종차별주의자다. '난 아닌데'라고 해서 혐의를 벗은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에 놀러간 D씨는 명품 가방을 도난당한 뒤 이탈리아인들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고 다닌다. E씨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 이들도 인종차별주의자다. 왜 그럴까. 그들은 타인을 미워한다. 그것도 한 사람이나 그의 구체적 행위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그가 속한 집단 모두를 증오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종차별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해왔는지를 밝히기 위해 고대 그리스인이 오리엔트 지역을 보는 관점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해 반유대주의,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르완다의 인종청소에 이르는 인종차별과 집단학살의 역사를 소개한다.

    타인을 증오할 수 있다면 어떤 이유라도 좋다

    인종차별의 욕망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미약해진다. 고대 그리스와 파라오가 다스리던 이집트의 옛 문서에는 문화 간 '차이' 이상의 '차별'을 발견하기 힘들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사'에서 "이집트에선 소변을 볼 때 여자는 서 있고 남자는 쪼그려 앉는다"고 문화적 차이를 지적하지만, 한편으론 두 문명의 신들에 대해 "디오니소스는 오시리스, 제우스는 아몬"이라며 동질성을 강조한다.

    그리스에서 인종차별적 견해가 등장한 것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한 이후다. 사회계층 간 갈등이 첨예해지고 외국인 용병들이 불만세력으로 대두하자 아테네에 '범(汎)그리스주의'의 기치를 든 웅변가들이 등장해 "열등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시아를 정복하자"고 외쳤다.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은 기원전 270년 마네토라는 이집트인 사제가 "유대인들은 한센병 환자들"이라고 주장한 문서에서 찾을 수 있다. 저자는 이 글이 "유대 민족에게 생물학적 차원의 저주를 내리고 결과적으로 유대인을 '오염된 인종'으로 보는 견해가 고착되는 계기가 됐다"며 이런 행위의 이유로 "모든 사회는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불순한 범주를 만들어내서 혐오스러운 부분을 사회 밖으로 투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15세기 이후 서유럽을 휩쓴 흑인 노예무역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약성경의 '벌거벗은 노아'를 동원한 사례 등 증오와 절멸을 합리화하기 위한 날조의 역사를 낱낱이 소개한다.

    과학의 발전을 인종차별 정당화에 악용해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권이 아버지에 의해서만 전달된다는 발상은 필연적으로 여자와 노예, 외국인을 소외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적으로 이를 뒷받침했다. 그는 "최초의 탈선은 남성 대신 여성을 출산하는 것"이란 주장을 폈다. 18세기 등장한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의 힘을 빌려 인종차별을 합리화했다. 그 배경에는 과학자들이 있었다. 네덜란드 해부학자 캄페르는 흑인과 원숭이의 두개골의 유사성을 연구했다. 저자는 이런 연구가 아무런 근거 없는 '사이비 과학'이지만 정치적 의도를 가진 자들에게 악용됐다고 지적한다. 결과는? '문명화된 유럽의 한복판'에서 20세기를 '대학살의 시대'로 만든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극이다.

    저자는 인종차별이 단순한 자민족 중심주의나 외국인 혐오보다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자민족 중심주의가 애국심을 앞세워 국가대표 운동선수를 응원하는 차원이라면, 인종차별은 상대방은 물론 그가 속한 집단 전체를 아예 말살하려고 덤벼든다. 또한 인종차별은 생물학적 차이 등 온갖 근거를 동원해 차별과 살인까지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외국인 혐오를 능가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쓸 무렵인 1990년대 말 프랑스는 약 370만명에 이르는 이민지와 거류 외국인 문제로 여론이 분열돼 있었다. 저자는 20세기 들어 프랑스에서도 나치독일 못지않은 다양한 인종차별 사례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비극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외국인 거류자 수가 140만명을 넘어서며 향후 인종문제로 갈등을 겪을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읽을 만하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