賢母良妻… 근대가 만든 판타지

    입력 : 2013.07.27 03:20

    1920~30년대 日 부인잡지 분석해 '주부' 이데올로기 탄생 과정 추적
    예쁘고 상냥하고 집안일 잘하고… 잡지 속에 등장한 '완벽'한 주부, 여성 독자에게 현모양처 환상 심어

    '주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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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부의 탄생|기무라 료코 지음|이은주 옮김|소명출판|375쪽|2만9000원

    "예쁘게 방긋방긋 웃자. 무서운 얼굴을 하지 마라. 시름에 젖지 말고 항상 쾌활해라. 노동으로 고생한 남편을 옆에서 위로하고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해도 거슬리지 말고 탄식도 하지 마라."

    근대 일본의 여성 잡지 '주부의 벗'(1917년 8월호)에 게재된 '주부의 노래' 일부다. 필자는 '이름 없는 모 부인'. "(주부가) 남편에게 천사가 돼야 가정은 천국이 된다"는 내용이다. 다른 잡지 '부인구락부'(1936년 3월호)에는 남성 시인이 쓴 '이상적인 아내-어느 남편의 노래'가 실렸다. "웃는 얼굴이야말로 당신의 보석이며 아름다움이다. 일에 지쳐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면 집에서 기다리는 당신. 그 웃는 미소는 피곤함을 치료하는 약이다."

    '주부'는 근대의 산물

    '남자=일, 여자=가정'이라는 성(性) 역할 분업은 근대의 산물이다. '현모양처' 개념 역시 이 시대의 유산.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선택된 국가 전략의 하나였고, 일제강점기에 국내에 유입됐다.

    조선시대에도 '어진 어머니'와 '착한 아내'의 덕목을 강조하긴 했지만, '현모양처'라는 어휘는 1906년 '만세보' 8월 2일자에 처음 등장한다. '여자=주부=착한 아내+현명한 어머니'라는 등식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강요된 미덕인 셈이다. 여기까지는 기존의 사회과학·인문과학 연구에서 많이 축적된 내용이다. 이 책은 한발 더 나아간다. "여성에게 불리한 제도였던 이 근대적 젠더 질서를 일부 여성은 온전히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 배경에 '매스미디어'의 역할이 있었다."

    일본 오사카대학 인문과학연구과 교수인 저자는 1920~30년대 부인 잡지에 그려진 근대적 여성상을 분석하면서 여성 독자가 미디어를 만나 어떻게 자발적으로 '주부'를 꿈꾸게 되는지 밝힌다. 주요 분석 대상은 1917년 창간된 대중잡지 '주부의 벗'. 도시화·산업화와 함께 증가하기 시작한 샐러리맨 가정의 주부를 겨냥한 이 잡지는 1934년 100만부를 돌파했고, 최고 전성기 때는 180만부를 기록했다.

    賢母良妻
    어떻게 '주부' 이데올로기를 구축했나

    저자는 1917년 창간호부터 쇼와 초기까지 약 20년간 '독자란'에 투고된 내용을 분석해 ①유익 ②수양 ③위안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를 뽑아냈다. 먼저 '유익'. 기능적 측면이다. 잡지는 25~30%를 수예, 요리, 미용, 육아 등 실용 기사로 채웠다. 목차에는 '간단한/손쉬운' '아마추어가 할 수 있다/누구나 할 수 있다' 등의 표현이 자주 보인다. 재봉·수공예·요리·가정 의료 등 각 장르의 전문가가 등장해 주부로서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전파한 것. 독자들은 "이만큼 친절하고 재미있고 유익한 잡지는 없다"며 환호했다. 잡지가 "아마추어이면서 만능의 전문가라는 비현실적인 주부의 이념상을 선동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158쪽)

    여성으로서 바른 삶, 멋진 삶은 무엇인지 규범도 제시했다. 둘째 키워드 '수양'이다. '주부의 벗'은 전기나 실화를 통해 여성의 이상형을 칭송하는 기사를 시리즈로 실었다. 주로 남편·아들의 입신출세를 자신의 삶의 보람으로 여기며,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남편과 아들을 전쟁에 바치는 '군국(軍國)의 여성'상이다. 저자는 "근대 일본의 현모양처주의와 입신출세주의라는 두 개의 이데올로기가 뒤섞여 나타난다"고 했다. 마지막 키워드는 '위안'. 잡지는 꿈의 세계이기도 했다. 주부 독자들은 화려한 삽화에 연애·섹슈얼리티 등을 버무린 연재 소설을 읽으며 '로맨틱 러브' '스위트 홈'이라는 환상을 채웠다.

    가족의 단란함을 담당하는 여신

    1931년 9월호 기사의 제목은 '아내여 가정의 태양이 되어 매력적으로 남편을 비추고 있습니까?' "첫째 요건은 이성으로서의 매력 유지. 그러므로 양처현모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남편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가사와 육아에 쫓겨 여성으로서 아름다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부는 집에 있을 때도 화려하게 화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유의해주십시오. 오늘은 양장이었다면 내일은 기모노…."

    ‘주부의 벗’ 표지의 미인화는 시대가 바라는 주부의 이상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①초기 1917~1920년에는 주로 기모노 차림에 머리 모양은 마루마게(묶어 올린 일본식 머리) 스타일. 연약하고 순종적인 주부 이미지. ②1922년부터는 사실적인 서양화를 표지에 차용하기 시작했다. ③1927년 6월호 그림. 볼이 통통한 건강하고 풍만한 여성상. ④1930년대에 와선 상업미술계의 미인 아이콘을 받아들인다. 갸름한 얼굴에 치아가 확실히 드러나는 요염한 미소가 돋보인다. ⑤전쟁이 본격화되는 1941년 이후엔 표지 그림도 군국(軍國)적 색채가 짙어진다. 노동과 육아에 종사하는 성실한 여성상을 표현했다.
    ‘주부의 벗’ 표지의 미인화는 시대가 바라는 주부의 이상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①초기 1917~1920년에는 주로 기모노 차림에 머리 모양은 마루마게(묶어 올린 일본식 머리) 스타일. 연약하고 순종적인 주부 이미지. ②1922년부터는 사실적인 서양화를 표지에 차용하기 시작했다. ③1927년 6월호 그림. 볼이 통통한 건강하고 풍만한 여성상. ④1930년대에 와선 상업미술계의 미인 아이콘을 받아들인다. 갸름한 얼굴에 치아가 확실히 드러나는 요염한 미소가 돋보인다. ⑤전쟁이 본격화되는 1941년 이후엔 표지 그림도 군국(軍國)적 색채가 짙어진다. 노동과 육아에 종사하는 성실한 여성상을 표현했다.
    "주부는 가정을 운영하는 능력자에 애인으로서의 매력, 성적 파트너로서의 섹슈얼리티, 정신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재치를 겸비한 전지전능한 존재"라는 이념을 주입하는 것이다. 잡지에서 주부는 '가정의 태양' '여신' '낙원의 여왕', 남편은 '수염 난 아이' '천진난만한 유치원생' '젖먹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남편을 자식처럼 생각해서 능숙하게 '조종'하는 것이 현명한 주부가 되는 요령이라고 설파하는 식. 결국 부인 잡지는 주부의 기능과 역할을 알려주는 백과전서이면서, 그것이 제공하는 환상에 의해 내면으로부터 원동력을 얻게 되는 이데올로기 장치의 역할을 했다.

    역자 이은주씨는 "'여자는 가정, 남자는 일'이라는 역할 분업이 국가에 의해 '강요된 이념'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여성 스스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라며 "우리의 젠더 질서가 일본에서 유입, 형성되는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남녀의 역할 구분이 해체되고 있다지만 '본디 여성은 주부이어야 한다'는 사회 풍조는 여전히 뿌리 깊고, 젠더 이데올로기는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등장하는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그런 반전 있는 여자"라는 가사는 '주부=가정의 태양'의 21세기 버전. 근대적 젠더 질서의 형성 과정을 '미디어'를 통해 밝혀낸 학술서이지만 대중서로도 손색 없이 흥미롭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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