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병하다' 대신 20세기 사전에 나타난 단어, 病菌

    입력 : 2013.08.03 02:56

    한국 의학수준 반영된 病名의 변천사
    원인 알 수 없는 무서운 질병 '괴질'… 콜레라균으로 원인 파악된 이후엔 日에서 부르던 '호열랄' 명칭 들어와
    병이 菌에 감염되는 것으로 인식되자 국가 차원의 위생 관리도 시작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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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환 마마 천연두|신동원 지음|돌베개|399쪽|2만원

    인류와 함께 병(病)도 생겨났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 부분에도 '환웅이 홍익인간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와 백성의 생명과 병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병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카이스트에서 과학사를 가르치는 저자는 "병명에는 그 병을 보는 인간의 시각과 병에 대한 이해, 의학 발달 수준이 함께 들어 있다"고 말한다. 병명은 거울이 되어 시대를 비추고, 타임머신이 되어 독자를 과거로 태우고 가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속을 보여준다.

    ◇괴질…병에 대한 무지와 공포의 고백

    콜레라가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기록은 1821년(순조 21년) 처음 등장했다. 콜레라에 대한 저항력이 없었던 조선인 수십만명이 첫 유행에 목숨을 잃었다. 판소리 '변강쇠가'는 '(시체의) 독한 내가 코 찌르니, 눈뜬 식구들은…다 죽는다'란 표현으로 가공할 전염력을 기록했다. 정체가 파악되지 않은 질병이란 뜻으로 괴질(怪疾)이란 이름을 그때 얻었다. 괴질이란 명칭은 질병에 대한 무지의 고백이자 공포의 표현이었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콜레라는 이듬해 일본으로 전파됐다. 일본은 이 병을 '호열랄'(虎列剌)이라 쓰고 '고레라'(コレラ)로 읽었다. 병은 조선보다 늦게 앓았지만 병의 정체가 콜레라균이란 사실은 먼저 파악했다. '호열랄'은 개항 후 우리에게도 전파됐다. 따라서 호열랄이란 병명에는 조선의 근대화가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던 역사를 반영하는 용어라는 의미까지 더해진다.

    일본 병명 호열랄은 조선에선 호열자(虎列刺)로 바뀌었다. '호열랄'은 1880년대 한성순보에 자주 등장했는데 인쇄 상태가 좋지 않아 랄(剌)인지 자(刺)인지 헷갈렸다. 어떤 사물에 '~자'를 붙이는 게 우리의 언어 습관이다 보니 1890년대 독립신문에는 어느새 호열자로 바뀌어 쓰였다.

    ◇국어사전, '병하다'는 사라지고 '병균'이 등장하다

    17세기까지만 해도 '병하다'라는 동사는 '병을 앓는다'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1897년 편찬된 '한영자전'에는 이 동사의 뜻이 '염병하다'의 준말이며 '염병(장티푸스)을 앓는 경우'로 한정되어 쓰인다고 돼 있다. 광복 이후 한글학회가 발간한 '큰사전'에서는 아예 사라졌다. 지금은 '염병할'이란 표현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병하다'라는 동사의 사멸과 '병균'(病菌)이라는 명사의 등장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병균'이란 낱말은 1938년 편찬된 '조선어사전'에 처음 등장했다. 어떤 단어는 새로운 관점과 함께 등장한다. '병균'이 그런 경우다. 신체는 '병하는' 것이 아니라 '균에 감염되는 것'이란 과학적 인식이 단어에 담긴 것이다. '병균'의 등장은 또한 세균의 증식과 전파를 막기 위한 강력한 국가 단위의 위생 행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됐다.

    ◇위생…몸에 대한 근대적 관심의 시작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는 위생을 개인적인 '섭생'의 문제로 간주하고 건강 증진법을 소개했다. 그러나 김옥균이 1882년 낸 '치도약론'에는 위생을 보는 관점이 개인의 섭생에서 국익으로 바뀌었다. 김옥균은 "전염병으로 인구가 늘지 않아 빨리 부강을 이룩하기 어려울 것", "시궁창이 되어 악취 나는 도로는 외국의 풍자를 받기에 충분하다"며 조선 사회의 낙후한 위생 수준을 미약한 국력과 문명적 후진성으로 인식했다.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어린이의 팔에 우두를 접종하는 장면.
    우리나라에서 두창에 감염된 소에서 추출한 우두(牛痘) 농을 접종해 천연두를 예방하는 우두법은 1880년대 이후 지석영·최창진 등이 보급하며 정착했다. 그림은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어린이의 팔에 우두를 접종하는 장면. 미국 화가 로버트 톰이 1950년대에 그렸다. /미시간대학교 소장
    유길준은 더 나아가 '서유견문'에서 '국가가 강력한 법이나 행정력을 동원해 개인의 보건과 위생에 간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 근거로 외국에서는 사법경찰 외에 행정경찰을 두고 있는데, 행정경찰은 전염병 예방과 소독, 종두, 식품 관리, 도살장과 화장터의 위생 관리 등 국민 건강을 지키고 감독하는 기능을 한다고 소개했다.

    위생 관리 역사에는 식민 시대의 암영도 드리워 있다. 일제는 칼을 찬 경찰과 헌병이 주민의 밀고나 가가호호 방문을 통해 환자를 색출한 뒤 격리 수용하는 강압적인 방식을 도입했다. '철저한 방역'이란 명분이 실은 조선인을 물리적으로 지배하는 데 유용한 도구로도 쓰인 것이다. 1917년 일본 법원은 '환자가 병을 퍼뜨렸더라도 고의가 없었다면 처벌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이는 철저히 일본인에만 해당되는 원칙이었다.

    책의 장정이나 내용은 전문서에 가깝다.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질병을 다룬 문학 작품까지 폭넓게 다뤄 읽는 재미를 끌어올렸다. 병 개념과 질병 관련 어휘의 형성·변천 과정에 제국주의 폐해가 겹친 한국 근대사를 고찰한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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