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고 강한 한국인, 100년 동안 만들어졌다

    입력 : 2013.10.19 03:03

    근대소설 속 격동기 겪은 주인공 통해 현재 한국인 등장하기까지 과정 밝혀

    '한국인의 탄생'
    한국인의 탄생|최정운 지음|미지북스|580쪽|2만원

    오늘날 한국인은 세계 최고 수준의 스마트폰 제조 기술을 가진 초일류 기업의 엔지니어들이고, 동남아시아 젊은이들을 매료시키는 K팝 스타들이다. 하지만 이런 한국인은 한 세기 전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던 그들이 아니라 이 땅에 새로 등장한 사람들이다. 한국인은 100년 전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우리 민족이 "일본인과 다른 우리는 누구인가?"라고 자문하면서 비로소 등장했다. 이렇게 등장한 한국인들의 모습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소설가들의 작품 속에 근대적 지식인, 민족운동가의 모습으로 녹아들었다. 저자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최정운 교수는 당시 우리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분석해 한국인의 탄생 과정을 추적했다.

    한반도 최초의 근대인 "내 목숨은 나의 것"

    이인직 신소설 '혈의 누'의 주인공 김옥련은 납치되어 일본으로 가고, '귀의 성'의 첩 길순은 본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한다. 공동체의 윤리가 무너지고 공권력이 해체돼 더 이상 국가라 할 수 없던 조선은 그녀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저자는 이를 17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홉스가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제시한 '국가 이전의 상황', 즉 야생의 질서가 지배하는 자연 상태로 규정한다. 이해조의 '화세계'에 나오는 김수정은 이런 현실에 맞서 적극적으로 운명을 개척한 한반도의 첫 근대인이다. 수정은 정혼한 남자가 행방불명된 뒤 부모가 새 혼처를 찾으려 하자 가출해 남자를 찾아나선다. 걸핏하면 죽을 결심을 하는 '혈의 누'의 김옥련을 의지박약한 여성의 전형으로 규정한 기존 평가도 뒤엎는다. 김옥련은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훼손할 수 없다'는 유교적 가치관에 맞서 "내 생명은 내 것"이라며 '근대적 개인'임을 선언한 여성으로 재정의된다.

    민족주의자의 등장

    이광수는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무정'을 통해 '이형식'이란 지식인을 창조했다. 이형식은 자신의 욕망을 인정한다. 여제자의 옷 안에 있는 알몸을 상상하고, '책상 아래로 무릎과 무릎이 가만히 마주 닿기도 하렷다'라고 독백하는 한국인이다. 이광수가 창조한 '욕망하는 한국인' 이형식은 자신의 사랑을 나라 잃은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켜 민족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신채호는 '꿈하늘'에서 또 다른 한국인 '한놈'을 창조했다. 한놈은 이형식처럼 유학을 한 지식인도, 여자를 보면 피가 끓어오르는 남자도 아니다. 인간적 욕구가 완전히 제거된 한놈을 통해 신채호는 일제와 맞서는 순수한 의미의 전사를 제시했다.

    약한 한국인, 강한 한국인

    김동인은 우리의 내면에서 일제 강점을 초래한 약한 사람과 그것을 이겨낼 강한 사람을 구별하고 그 본질적 차이를 규명하려 했다. '감자'에서 왕서방에게 살해당하는 복녀는 자신의 몸을 돈 주고 사는 손님에 불과한 왕서방에게 이유 없는 질투심을 드러냈다가 살해당한다. 어떻게든 제 처지를 '극복'할 능력이 안됐던 한국인의 한 단면으로 그려진다. 반면 '붉은 산'의 주인공 삵은 이웃 조선인이 중국인 지주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하자 홀로 중국인 지주를 찾아가 항의하다 맞아 죽는다.

    김동인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변장호 감독의‘감자’에서 복녀로 나온 강수연(위 사진). 한국인은 누구인가.
    김동인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변장호 감독의‘감자’에서 복녀로 나온 강수연. 복녀는 자신의 힘으로 빈민굴을 벗어나지 못한 나약한 인물이다.
    대도시의 모던뽀이들

    1930년대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인구 40만의 대도시 서울에 민족 개조의 신념으로 가득 찬 소설 '무정'의 '이형식'과 '꿈하늘'의 저돌적 전사 '한놈'을 위한 공간은 없었다. 이때 등장한 한국인이 '소설가 구보'(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와 '성매매 여성의 남편'(이상 '날개')이다. 소설가 구보는 초라한 지식인이다. 직업이 없어 어머니 눈치를 봐야 하고, 집에 있는 것이 어색해 서울 거리를 하루 종일 헤맨다.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은 심지어 사창가에 살며 여자가 몸 팔아 버는 돈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소설가다. 이들은 그러나 '민족의 선생'이란 거창한 지위를 포기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기 위해 연착륙을 시도한 도시형 지식인들이다. 박태원과 이상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비록 유학을 통해 서구의 지식을 들여온 이형식처럼 고상하진 않지만 새로운 사상의 창조자로 거듭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이들이다. 이상은'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라고 문장에 그 꿈을 담았다.

    강한 한국인의 등장

    이광수의 '유정'에 나오는 최석은 이형식처럼 피가 뜨거운 사람이다. 그는 양녀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모함을 받고 사회적으로 살해당한다. 최석은 그러나 좌절하는 대신 자신을 쫓아낸 조선 백성을 사랑하는 삶을 택함으로써 고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부서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정신의 강인함을 획득한다. 벽초 홍명희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임꺽정'은 변신을 거듭하며 지치지 않고 싸우는 진취적인 한국인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 책은 다양한 층위의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무엇보다 소설 속 인물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를 밝히려는 시도가 참신하다. 방대한 양의 소설에서 발췌한 문장을 읽는 재미도 크다. 소설 인용과 평론가적 해석만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지 않고 풍부한 사회학적 이론과 당시 신문 기사를 곁들인 노력도 책의 가치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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