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건국의 숨은 영웅, 대구(大口)

    입력 : 2014.03.08 10:16

    대구의 서식 경로 = 신대륙 발견의 경로
    美 독립혁명도 英 대구 무역제한으로 촉발
    "세계 역사와 지도는 대구 漁場 따라 변화"

    대구(C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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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Cod)|마크 쿨란스키 지음|박중서 옮김|RHK|363쪽|1만6000원

    바이킹이 10세기 노르웨이에서 출발해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거쳐 캐나다에 닿는 것을 대서양 대구(Cod)는 보았다. 그 항해로는 대구의 서식 경로였다. 입을 벌린 채 헤엄치면서 뭐든 먹어치우는 이 '입 큰 물고기(大口)'의 눈에 비친 인간은 그들보다 훨씬 탐욕스러운 잡식성 포식자였다.

    대구는 길이가 1m에 이르지만 얕은 물을 좋아해 잡기 쉽고 맛이 담백하다. 뱃사람에게는 커다란 빵과 같았다. 추운 날 이 물고기를 매달아 놓으면 부피가 5분의 1로 줄어들면서 장작처럼 딱딱해진다. 그럼 잘게 부숴 씹어 먹을 수 있다. 대구는 지방이 거의 없어 잘 말리면 상하지 않는다. 육지에서 잉여식품(빵)이 생긴 덕에 도시가 형성되고 교역로가 점점 길어졌듯이, 바다에서는 대구 덕에 더 먼 바다로 항해해 새로운 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부·극작가·요리사·제빵사를 경험한 미국 저널리스트 마크 쿨란스키(Kurlansky)는 역사 속 대구의 역할과 생태, 요리법 등 대구의 모든 것을 취재하고 고증해 이 논픽션을 썼다. 글감 하나를 붙들고 7년을 쏟아붓는 집념, 깊이와 넓이로 독자를 압도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 환경의 차이 때문"이라고 했다. '대구'에서 쿨란스키는 "세계의 역사와 지도는 대구 어장(漁場)을 따라 변화해 왔다"는 신선한 프레임을 보여준다.

    신세계 발견과 정착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걸쳐 있는 바스크 지역 사람들에게는 바이킹에겐 없는 소금이 있었다. 그들은 식량으로 쓸 생선을 소금에 절여 먼바다까지 나가 대구를 잡았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금식일에 성교는 물론 동물의 살을 먹는 것도 금지했지만 '차가운' 식품은 허용했다. 생선은 차가운 식품으로 간주됐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금요일, 사순절 기간, 다른 여러 금식일을 합치면 육지 고기를 먹을 수 없는 날이 한 해의 절반을 차지했다. 대구는 그래서 대중적인 생선이 됐고, 15세기에는 유럽 전역의 상인들이 앞다퉈 대구 어장을 찾아 나섰다.

    1497년 영국 국왕의 후원을 받아 향신료 무역 항로를 개척하러 간 존 캐벗은 항해 35일 만에 낯선 육지를 발견했다. 근해에는 대구가 가득했다. 이 '새로 발견한 땅(New Found Land)'이 바로 캐나다 뉴펀들랜드다. 17세기 초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 청교도들이 정착한 곳의 지명은 '케이프 코드(Cape Cod·대구 곶)'였다. "해안에 대구가 들끓었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매사추세츠에 주민이 모여들어 어촌이 형성됐고, 상당한 소비력을 지닌 도시 보스턴도 생겨났다.

    대구(Cod)
    "유럽인의 관점으로 보면 대구 덕에 뉴잉글랜드를 발견한 셈이었다.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대구 어업과 무역으로 부유해졌고 '대구 귀족'이 등장했다. 상업(자본주의)은 그들의 종교가 되다시피 했다."

    대구를 팔고 노예를 사다

    노동집약적 농공업이었던 설탕 생산을 위한 17세기의 전략은 노예를 통해 인건비를 낮추는 것이었다. 카리브해의 작은 섬까지 끌려온 노예들은 소금에 절인 저급한 대구를 먹으며 일했고, 오래지 않아 '대구·노예·설탕'이라는 삼각무역이 시작됐다. 서아프리카에서는 대구를 팔아 노예를 살 수 있었다. 자유를 사랑한다는 미국인들이 대구로 노예무역을 촉진한 것은 아이러니다.

    혁명의 배후에도 대구가 있다. 18세기 들어 영국이 식민지인 뉴잉글랜드의 당밀과 차에 세금을 매기고 대구 무역을 제한하자 미국 독립혁명이 촉발됐다. 1782년 영국과의 평화협상에선 미국의 대구잡이에 대한 권리가 쟁점이 됐다. 대구는 돈이자 삶의 땔감과도 같았다. '월든'으로 기억되는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런 문장을 남겼다. "부두에 쌓여 있는 소금 절임 대구를 장작더미로 착각했다. 하지만 대구는 우리에게 필수적인 불길을 유지하게 해주는 연료임이 틀림없다."

    20세기 들어 트롤선과 저인망이 등장하면서 대구 어획량은 늘고 가격은 폭락했다. 대구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아마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6년 동안일 것이다. 트롤선이 모두 징발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유럽에서 유일하게 대구 어업을 지속한 아이슬란드는 종전 후 1958년부터 1975년까지 영국과 '대구 전쟁(Cod War)'을 벌였다. 양국 간 다툼을 조정한 결과, 200마일 배타적 경제수역(EEZ)이 처음 탄생했다.

    텅 빈 바다

    이 책은 대구를 내시경 삼아 인류 역사와 탐욕을 살핀다. 번창할 땐 끝을 모른다. 지력(地力)을 급격히 소진시키는 무분별한 벌목의 바다 버전을 대구에서 보게 된다. 한때 바다의 황금으로 통했던 대구는 이제 '상업적 멸종'과 싸우는 신세가 됐다. 1992년 캐나다 정부는 뉴펀들랜드 근해 등에서 해저 어업을 무기한 금지했다. 어민은 일자리를 잃고 사람 떠난 어촌은 황폐해졌다.

    당신은 "자연의 회복력을 믿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쿨란스키는 이렇게 응수한다. "너무 오랫동안 사람들은 자연의 꿋꿋한 생명력에 잘못 사로잡혀 있었다. 자연과 진화는 인간의 활동과 분리된 게 아니다. 사람 또한 자연에 속해 있다."

    '대구탕하고 눈길은 뒤가 좋다'는 일본 속담이 있다. 대구탕은 오래 끓여야 맛있고 눈길은 남들 뒤를 따라 걸어야 안전하다는 뜻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에서 수입하는 대구에 대해 안전성 논란도 있었다. 대구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얼마나 헝클어졌는지 보여주는 표본이다. 활자가 작아 독서를 방해하지만 호흡이 길고 단단하다. 책을 덮으며 묻게 된다. 바다에서 땔감을 다시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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