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좋은 죽음'이라는 역설

    입력 : 2015.09.05 00:32

    어수웅·Books 팀장 사진
    어수웅·Books 팀장
    올리버 색스의 부음(訃音)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이번 주 도착한 신간 중에서 자연스럽게 '좋은 죽음'(청년사)으로 손이 갔습니다.

    읽어보니 역설적 제목이었습니다. 안락사와 존엄사가 '좋은 죽음'이라고 칭찬받는 시대에 대한 반박이었죠.

    왜, 요즘은 그런 분위기잖아요. '연명 조치'가 나쁜 말인 것처럼 얘기하는 시대. 튜브를 통해 영양을 보급받는다든지 인공호흡기를 단다든지 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인간답지 않다'는 식으로. 물론 '무의미한 연명 치료'는 중단하는 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발자국 더 들어가보면 어떨까요. 어디부터 '의미'이고, 어디까지가 '무의미'입니까. 대부분은 0과 100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지 않습니까. 건강할 때 당사자가 '연명 치료 포기 각서' 같은 걸 쓴다고는 하지만, 정작 나중에 자신은 살고 싶은데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어떨까요.

    도쿄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리츠메이칸대학 생존학연구센터장을 맡고 있는 다테이와 신야의 '좋은 죽음'은 이들을 위한 항변입니다.

    존엄사는 "자연스러운, 그리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자기가 결정하는 죽음"이라고들 하죠. 인공적으로 연명하는 것이 무의미한 삶이라고 치부하지만, 사실은 살고 싶다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중요할 겁니다. 한마디로 '좋은 죽음'을 강요하지 말고, '그대로의 삶'을 인정하자는 것이죠. 환자의 고통을 완화하는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고 존엄사를 말하는 것은 순서가 바뀌었다는 겁니다.

    100세 시대입니다. 아직은 멀었다며 고민과 생각을 미루지만, 그래서 더욱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 상반기에 나온 글 쓰는 외과 의사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부키)와 함께 이 책을 추천합니다. '좋은 죽음'은 조금 투박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독자의 인내력을 요구할 만큼 학술서에 가깝지만, '좋은 죽음'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넓힐 기회입니다. 편안한 9월의 첫 주말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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