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경은 임금을 엿보는 불경스러운 물건이었다?

    입력 : 2015.12.19 11:39

    안경·망원경·자명종·양금·거울 5가지로 본 조선 문물수용史
    대부분 양반의 기호품에 머물러 격리된 지식사회의 한계 아쉬워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강명관 지음|휴머니스트|348쪽1만8000원

    "내게 밝은 두 눈이 있었으니/ 하늘이 주신 것 실로 많았지./ 기운이 쇠하여 어두워지자/ 하늘 역시 어찌할 수 없었는데/ 또 이처럼 반짝이고 환한 물건을 내어주시어/ 사람에게 주어 그것에 의지하게 하니/ 이제 노인이 아니고 젊은이가 되었네/ 털끝만 한 것도 자세히 눈에 들어오니/ 누가 이런 이치를 알아내었을까?'(이익 '애체경명' 중에서)

    감탄과 감사의 마음이 그야말로 절절하다. 독서인을 자처하는 조선의 선비들에게 안경은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광명을 찾아준 안경에 환호할 수밖에.

    한문학자 부산대 강명관(57) 교수의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은 안경, 망원경, 자명종, 유리 거울, 양금(洋琴) 등 다섯 물건으로 살펴보는 조선의 서양 문물 수용사다. 상반기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의 '담바고 문화사'도 그랬지만, 원전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학문 세대의 엄밀한 텍스트 분석과 현대적 재해석이란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노안(老眼)이 온 사대부를 환호하게 만든 안경뿐만 아니라, 하늘의 비밀을 밝히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도운 망원경, 청동 거울을 역사의 유물로 만들어버린 유리 거울,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니만큼 권력과 동의어였던 자명종, 서양과 중국과 조선의 크로스오버였던 현악기 양금이 그 목록이다.

    이한철(1812~1880 이후)과 유숙(1827~1873)이 합작한‘흥선대원군 초상’. 책상 오른쪽에는 색을 넣은 안경이 있고, 왼쪽에는 내부가 약간 보이는 자명종이 있다. 자명종 위쪽에 손잡이가 있고, 내부를 자세히 보면 톱니바퀴가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이한철(1812~1880 이후)과 유숙(1827~1873)이 합작한‘흥선대원군 초상’. 책상 오른쪽에는 색을 넣은 안경이 있고, 왼쪽에는 내부가 약간 보이는 자명종이 있다. 자명종 위쪽에 손잡이가 있고, 내부를 자세히 보면 톱니바퀴가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왜 이 다섯 문물인가. 어쩌면 위에 한두 줄로 요약한 이 물건 수식절(修飾節)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근대 문명사에서 큰 의의를 가졌음에도, 조선의 수용 양상은 조금 달랐다고 강 교수는 설명한다. 안경이나 유리 거울은 편리함과 유용성이 알려져 신분과 계층에 상관없이 확산됐지만, 망원경이나 자명종은 호기심 있는 양반 소수의 완호품(玩好品)에 머물렀다. 애완이나 기호품에 불과했다는 자조다.

    이런 일화가 있다. 1712년 조선과 청은 국경을 정했다. 청에서는 목극등(穆克登)이, 조선에서는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李善溥) 등이 나갔는데, 청은 위도와 경도를 알게 해주는 육분의(六分儀)와 망원경 등 다양한 측량 도구를 썼다. 육분의는 난생처음이라 언감생심이었지만, 이선부는 그나마 망원경을 본 기억이 떠올라 조정에 보내달라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왕은 망원경 따위 믿을 수 없다며 잘랐다는 것. 표면적으로는 성능이 부실하다는 게 이유였지만, 내심은 이랬다고 한다. 망원경의 또 다른 명칭은 규일영(窺日影). 규일은 해를 엿본다는 의미로, 왕은 곧 임금을 엿본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영조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대저 이런 물건은 기교(技巧)한 것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도리에 비추어 볼 때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자명종도 마찬가지다. 조선은 산업사회가 아니라 농업사회. 분초는커녕 1년을 24등분한 24절기만 알아도 충분히 생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에서, 자명종은 완호품에 불과했다. 그러니 안경을 제외한 다른 물건들이 사치품 취급을 당할 수밖에.

    겉면을 조각한 휴대용 거울.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겉면을 조각한 휴대용 거울.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다섯 가지 물건이 얼마나 유통되고 수용되었는지는 각각 차이가 있다고 했지만, 각 물건 이면에 놓인 원리와 제조 기술에 대한 이해 부재(不在)는 공통적이었다. 강 교수는 물론 "이 서양 물건들이 온전하게 수용되지 않은 것과 원리에 대한 무관심을 조선의 실패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열패감을 지울 수는 없다. 서양의 사회적·문화적 맥락과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의 맥락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더라도 말이다.

    저자도 아쉬워하고 있지만, 이는 격리된 공간이었던 조선 후기 지식 사회의 어떤 한계를 보여준다. 문물사(文物史)를 읽는다는 게 단지 옛 물건에 대한 호사가의 독서 취미로 그친다면 아쉬운 일. 책 속에 담긴 이야기와 당대 현실이 하나로 합쳐질 때 비로소 옛사람의 지혜를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확장하면, 국제 정세의 흐름과 맥락을 적극적·자발적으로 따라잡지 못하고 자신만의 격실에 갇혀 있는 지식인들이 오늘날에도 다수인 것은 아닐까. 이 물품들이 왜 완호품에 머물렀는지에 대한 냉철한 직시와 성찰이야말로, 우리가 조선 후기 문물 수용사를 2015년에 읽어야 할 이유일 것이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