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시대착오적' 圖錄 만들기

    입력 : 2017.01.06 23:46

    어수웅 Books팀장
    어수웅 Books팀장
    한 권이 888쪽인 두툼한 '벽돌책'이 나왔습니다. 제목은 '해찰: 언저리의 미학·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수류산방 刊).

    제목이 길고 난해한 이 책의 정체는 도록(圖錄)입니다. 아시죠? 미술 전시회마다 별책 부록처럼 따라오는. 수류산방의 문제의식은 요즘 사람들이 도록을 잘 안 본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요? 놀랍게도 이 '시대착오 출판사'의 전략은 "보지 않는다면 읽게 만들겠다"는 것. 윌리엄 켄트리지(62)는 1년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작가입니다. 전통적 의미의 화가라기보다는 드로잉 애니메이션 중심의 전방위 예술가. 70년대 한국 같은 남아공의 독재와 인권탄압 고발이 주제입니다. 관습적 도록이라면 작가와 작품 세계를 차곡차곡 모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 '도록 아닌 도록'에는 미술 평론가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학자와 전문가들이 가세했군요. 재일 교포 학자 서경식은 '계몽주의 이후 시대의 우수(憂愁)를 응시하는 것'이라 해석한 글을, 최근 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를 펴낸 문학비평가 함돈균은 켄트리지를 우리의 시인 이상·김수영과 비교하는 글을 제출했군요. 역사학자 염운옥은 '과도기의 정의'를 주제로 긴 글을 보내왔고요.

    1년 전 겨울, 저는 '르네상스인' 인터뷰 시리즈에서 수류산방의 박상일 대표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전 직원 다섯 명에 불과한 이 작은 출판사가 디자인 명가(名家)가 된 숨은 비결은, 남들이 멍청하다고 비웃을 만큼 몸과 마음과 시간을 쏟는 우직함에 있다는 내용이었죠.

    2015년 수류산방이 파주북어워드 출판미술상을 받았을 때, 박 대표의 기념 강연 제목에도 '언저리의 미학'이 들어갑니다. '언저리의 미학'은 수류산방의 세계관이죠. 비주류로서, 처음 시작할 때의 원칙과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것. 그렇다면 이 도록의 원칙과 초심은 무엇일까. 유명 해외 작가의 단순한 수입이나 소개가 아니라, 우리 시각으로 우리가 해석한 도록을 내겠다는 것. 책 자체로도 편집 디자인의 실험이자 예술적 오브제이지만, 이 도록을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 읽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