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전철역 항아리, 그 안에 詩 있다

    입력 : 2017.02.04 03:02

    '詩항아리' 관리하는 정황수 시인

    시청역 등 3곳 항아리 담당
    "詩를 나누는 건 꽃씨 뿌리는 것…따뜻한 마음 피어났으면"

    전직은 은행원
    11년간 해외서 근무… 詩 쓰며 향수 달래기도
    은퇴 후 시조 시인 등단

    서울 지하철 시청역 3번 출구 지하도 한편에 '시(詩)항아리'가 있다. 어른 허리 높이만 한 항아리에 시 두루마리가 소복이 담겼다. 펼치면 손바닥만 하다. 사람들은 쓰레기통인 줄 알고 다가갔다가 시 한 편씩 품고 나온다. 시항아리가 마를 날이 없다. 시조 시인 정황수(69)씨가 꼬박꼬박 채워 넣어서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1번 출구와 을지로입구역 1-1번 출구 지하도에 있는 시항아리 관리도 정씨 몫이다. 시항아리 청소도 한다. 2014년 7월 서울시와 서울메트로가 '詩의 도시 서울 프로젝트' 일환으로 3곳에 시항아리를 놓았을 때부터 정씨가 관리해 왔다. 이후 서울 지하철역 15곳에 시항아리가 추가로 생겼지만 정씨가 맡은 3곳을 빼고는 대부분 각 지하철역과 가까운 교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원래는 제가 다니는 대한성공회에서 3곳의 시항아리를 맡기로 했는데 제가 자원했어요. 시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좋은 시를 많이 읽었으면 해서요. 성공회에선 1년 두루마리 제작 비용 120만원을 지원해요. 3개월에 두루마리 1만2000장을 만드는데, 시 선정부터 인쇄된 시를 둘둘 말아 고무줄 끼우는 일까지 제 몫이죠."

    이미지 크게보기
    정황수 시조 시인은 서울 시청역 등 지하철역 3곳에 놓인 시항아리를 가꾼다. 정씨는 “출퇴근하는 서민들이 시 한 편씩 읽으면서 따뜻한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 박상훈 기자
    정씨는 은행원이었다. 1969년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상업은행에 입사해 2003년 퇴직했다. 어릴 적 꿈은 은행원도 시인도 아닌 농부였다. 태어난 곳은 경북 영주시 풍기읍, 소백산 밑 작은 시골 마을. 안동 농림학교 원예과에 들어가서 꽃 기르고 농사짓는 법을 배웠다. 그러다 "동네 형님이 돈 많이 벌려면 농사짓는 대신 대학 졸업해서 취직해야 한다고 해서" 서울로 유학 오게 됐다. 그는 상업은행에 입사해 대부분 국제금융부에서 일했다. 영국 런던, 미국 LA·시카고 등 11년 동안 해외에서 근무했다. 정씨는 "해외에서 주로 영어만 쓰다 보니 우리말에 더 관심을 두게 됐다"고 했다. 그는 "외국에서 틈틈이 시간 나면 시조 짓는 버릇이 생겼다"며 "시조 쓰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삭였다"고 했다. 정씨는 은행 퇴직 후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2010년 계간지 '문예운동' 겨울호에 '종심에 기대어'란 시조로 등단했다.

    시항아리에 채우는 시는 90% 이상이 시조라고 한다. 정씨는 "시조는 정형시라 길이가 짧아 작은 용지에 인쇄하기 적합하다"며 "팍팍한 도시민의 삶을 위로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는 "처음 시항아리 일을 시작할 때는 속상한 일이 많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시항아리에 쓰레기 버리고 코 풀고 침 뱉고 낙서했기 때문"이다. "쓰레기통이 돼 버린 시항아리가 지긋지긋했는지 어느 날 역장이 말도 없이 치웠어요. 사정사정해서 다시 가져다 놓았죠. 한때는 매일 경기 김포 집에서 1시간 반 걸려 서울로 지하철 타고 와서 3곳을 돌아가며 지키고 틈나는 대로 청소했어요." 정씨는 지금도 항상 가방에 비닐봉지와 장갑, 물티슈를 가지고 다닌다.

    그는 "시항아리를 깨끗하게 관리하다 보니 찾는 이가 점점 많아졌다"고 했다. 시항아리를 지키는 노숙자도 생겼다고 한다. 정씨는 "시항아리 관리하는 일은 사람들 마음에 꽃씨를 심는 일"이라며 "출퇴근하는 서민들이 시 한 편씩 읽으면서 따뜻한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 지하철역 가쁜 걸음 매무새를 가다듬고/ 여명을 지워갈 때 방점 무장 찍고 싶다/ 행간(行間)에 벙긋한 꽃잎. 북악을 물들일 날.' (꽃씨를 심다·정황수 作)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