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시대의 숭고美… 2800점 도판 모은 '이미지 보물 상자'

    입력 : 2017.02.10 23:23

    18C 디드로 '백과전서' 첫 번역… 텍스트 제외, 2885점 도판만 해설
    인문학·자연과학·기술 등 분류… 시간여행 고고학의 즐거움 누려

    '백과전서 도판집'
    백과전서 도판집(전 5권)ㅣ드니 디드로 편집ㅣ홍성욱·윤경희 해설ㅣ정은주 옮김ㅣ프로파간다ㅣ총 3338쪽ㅣ세트 18만원

    시인 보들레르의 산문 '장난감의 모랄'(1853) 한 대목으로 시작해보자. 소년 시절의 보들레르가 귀부인 팡쿠크의 집을 찾았을 때, 부인이 말한다. "여기 꼬마 도련님에게 무언가 주고 싶어. 나를 기억할 수 있게." 팡쿠크 부인이 방 하나를 열자, 정말이지 요정 나라 같은 굉장한 장면이 펼쳐졌다고 한다. 벽이 보이지 않는 장난감의 산(山). "천장은 경이로운 종유석처럼 매달려 만발한 장난감들 위로 가려졌다. 가장 값나가는 것부터 가장 순수한 것까지, 가장 단순한 것부터 가장 정교한 것까지, 온갖 장난감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이 요정 나라가 '백과전서'의 도판집(圖版集)이라면 어떨까.

    18세기라는 시대적 한계와 18만원이라는 부담스러운 숫자는 잠시 괄호 속에 넣어두도록 하자. 우선 서지학적 정보부터.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1713~1784)가 주도한 '백과전서'.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백과사전의 고유명사로 우리는 알고 있다. 계몽의 시대여서 가능했던 보편적 지식의 집대성. 1751년부터 1772년까지 도합 28권으로 완간됐다. 본서 17권에 도판집 11권. 판본과 셈법에 따라 이견은 있지만, 표제어 7만 1818개에 도판은 2885점이라는 게 해설 쓴 문학평론가 윤경희의 설명이다.

    28권의 전작은 국내에 번역된 적이 없다. 7만 표제어 중 하나인 '백과사전' 항목만을 뽑아 도서출판b에서 얇은 번역본을 펴냈을 뿐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아무리 '백과전서'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뿌리였다 할지라도, LTE 속도로 변화하는 2017년의 세계에서 300년 전 사전에 어떤 실용(實用)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실용'의 재정의가 필요하다. 출판사 프로파간다가 펴낸 국내판 '백과전서'에 본서 17권의 활자 텍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도판은 남김없이 실었다. 방점은 도판(圖版)인 것. 총 4권에 2885점의 도판을 모았고, 별도로 한 권에는 목차와 해설을 실었다. 과학철학 전공인 서울대 홍성욱 교수의 '보편적 지식의 집대성을 통한 사회진보 프로젝트'와 비교문학 전공자인 문학평론가 윤경희의 '백과전서 도판집 가이드'가 그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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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과전서 도판집’의 기마상 주조(鑄造). 석고를 거푸집에 부어 기마상의 주형을 떴다. 디드로가 주도한 이 르네상스 시대 교양의 집대성에는 총 2800점이 넘는 도판이 등장한다. 왼쪽 그림은 도판집 1권에 실린 흉부 동맥 상세도와 심장 상세도. /프로파간다
    '백과전서 도판집'을 현대적 의미의 쓸모나 정보로 접근한다면 '시대착오'의 메아리만이 되돌아올 것이다. 매혹와 혐오를 동시에 지닌 이율배반적 이미지는 차라리 미학적 쾌감이자, 예술적 영감의 원천.

    '현미경으로 본 벼룩'(2권 1378·379쪽)의 기괴한 이미지에 시선을 빼앗긴다. 17세기 초에 발명된 현미경 덕에 벼룩은 그 앞쪽 페이지에 먼저 등장한 코끼리·코뿔소·호랑이의 크기로 다가온다. 청동 배갑을 두르고, 강철 침으로 무장하고, 조류(鳥類)의 두상을 한 괴물.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1915~1980)는 매혹과 혐오를 동시에 지닌 이 괴물을 '기이한 숭고'로 표현했다. 마치 신화의 용 같은 이미지로 격상되었다는 것이다.

    삽에 기대고 있는 들판의 해골, 정육점에서 도축되는 소, 대동맥과 대정맥으로 묘사한 인체 해부도 등 도판들은 그 자체로 꼼꼼함과 치밀함을 대표하는 이미지면서, 요즘 세대에게는 사물에 대한 낯선 관점이기도 하다. 롤랑 바르트는 "백과전서의 도판들은 학술 정보만 전달하는게 아니라, '이미지 시학'이라 할 만한 심오함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이 책의 도판은 크게 인문학, 자연과학, 수공업 기술 등 세 영역으로 구분한다. 농사짓는 인간, 치아와 두개골과 슬개골을 클로즈업한 당대의 해부학, 구령에 따라 자세를 취하는 보병의 자세, 페르시아에서 벵골에 이르는 세계의 모든 문자, 수도원장의 긴 망토를 위한 양복 재봉 등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이미지들이 이 안에 있다.

    디드로는 이 책에 수록될 기계들이 전부 '현행 운용 중'이어야 한다고 할 만큼 '실용'을 강조했다고 한다. 어쩌면 아이러니다. 18세기의 실용이, 지금은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작동하게 됐으니 말이다.

    십수 종 영인본을 재료 삼아 컴퓨터로 최대한 정교하게 복원했다는 점은 국내판 '백과전서 도판집'의 미덕이지만, 개별 그림의 상세 해설을 번역하지 않았다는 점은 '백과전서 도판집'의 한계다. 현재는 각 도판의 짤막한 사진설명에 머물러 있는 상태. 김광철 편집장은 "원래 디드로 탄생 300주년인 2013년에 펴내려고 그 전해에 시작했던 프로젝트"라면서 "1년을 예상하고 시작했지만 곧 엄청난 작업임을 깨닫고 4년 내내 매달려 가까스로 마무리했다"고 했다.

    백과전서 도판집에는 '광산광물학'의 이미지가 있다. 동굴의 광부는 인적 없는 자연에 갱도를 뚫고, 그것들을 연결시키며, 안간힘을 다하며 지하에 사람의 서명을 남긴다. 시간여행자이자 고고학자가 된 당신 역시 이미지의 갱도를 뚫고 연쇄와 순환으로 사유의 사슬을 잇는다. 삶을 당대의 실용으로만 평가하는 현실주의자들은 절대로 누릴 수 없는 쾌락의 탐닉. 팡쿠크 부인의 장난감 요정 나라에서 탄성을 연발했던 소년 보들레르가 여기에 있다. 한입 한입, 남몰래 베어 먹는 이미지의 보물 상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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