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함께 2900㎞… 76세 '길의 왕'이 다시 걸었다

    입력 : 2017.02.10 23:42

    프랑스 도보 여행자 '올리비에'
    실크로드 중 걷지 않았던 길, 혼자 아닌 연인과 넉 달 동안 완주

    현지 사진 없이 오직 글로만 기록… '플라테'가 담아낸 후반부도 눈길

    '나는 걷는다 끝.'
    나는 걷는다 끝.|베르나르 올리비에·베네딕트 플라테 지음|이재형 옮김|효형출판|312쪽|1만3000원

    "왜 안 떠나는가? 영원한 휴식을 취하게 될 날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데."

    심혈관계 질환, 신장결석, 기억력 감퇴, 경동맥 협착증도 그를 막지 못했다. 1938년에 태어났으니 여행을 마쳤던 2014년 기준으로 76세.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프랑스 리옹에서 터키 이스탄불까지 2900㎞를 넉 달에 걸쳐 걸었다. 예순넷이던 2002년 6월, 그가 이스탄불에서 출발해 1만2000㎞를 걸어 중국 시안(西安)에 도착한 때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뒤다.

    이번 책은 당시 중국과 프랑스를 연결하는 실크로드 중 그가 걷지 않았던 리옹에서 이스탄불까지를 2013년과 2014년 두 번에 나눠 걸었던 기록이다. 코소보, 불가리아, 세르비아, 유고슬라비아 등 치안이 불안정한 국가를 여럿 지나는 길이다. '르피가로' '파리 마치' 등 프랑스 유수 언론에서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던 그는 아내와 사별하고 일선에서 물러난 뒤 걷기에서 삶의 목표를 찾았다. 홀로 1099일 동안 실크로드를 걸었던 기록을 정리한 전작 '나는 걷는다'(전 3권)는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네 사막을 지났고 평균 해발고도가 6100m 이상인 파미르고원을 넘었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길의 왕'.

    올리비에도 처음에는 고민했다. "10년 전이라면 왜 못 했겠는가. 이제는 등산화를 넣어두고 슬리퍼를 꺼내야 할 시간이다. (여행은) 말하자면 생명 수류탄의 안전핀이 뽑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28세 연하 연인 베네딕트 플라테가 가슴속 불을 댕겼다. "리옹에서 이스탄불까지 걸으면 실크로드 여행을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텐데, 왜 안 하는 거예요?"

    그가 2012년 제주도 올레길을 찾았을 당시 모습.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76세의 나이로 리옹에서 이스탄불까지 2900㎞ 넘는 거리를 걸었다. 사진은 그가 2012년 제주도 올레길을 찾았을 당시 모습. /조선일보DB
    올리비에와 플라테가 함께 걸은 길
    홀로 사색하며 휴대폰 없이 길을 걷기를 고수했던 그는 이번 여행에서 원칙을 깼다. 연인과 함께 걸었고(키도, 걷는 속도도 똑같은 천생연분이라고 한다), 이메일 확인을 위해 휴대폰도 들고 갔다. 그렇지만 길을 잃으면서도 끝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올리비에식 여행은 여전하다. 종이 지도를 들여다보며 길을 찾고, 세 갈래 갈림길에서는 10년 전처럼 거의 매번 길을 잃는다. 휴대폰이 있어도 숙소 예약을 하지 않고 버틴다. 그러다 해발 2000m 알프스 산맥에서 야영해야 할 위기에 닥친다. 중국 시안까지 짐을 옮겨줬던 짐수레 '율리시스'는 이번에도 수시로 고장 난다.

    넉 달 동안 10여 국가를 걸었다. 책에는 흔한 여행 사진 한 장 없다. 압도적 풍광, 내전으로 짓밟힌 동유럽, 매일같이 먹고 싶다는 현지 음식을 글로만 설명했다. 2012년 한국을 찾았을 때 올리비에는 이렇게 말했다. "감동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은 글이다. 내가 독자들에게서 받은 가장 큰 칭찬은 '이 책을 읽으면 마치 저자 옆에서 걷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여행지의 사진을 실었다면 이런 감동은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 철학 그대로다.

    올리비에(오른쪽)와 플라테가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함께 찍은 사진
    올리비에(오른쪽)와 플라테가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함께 찍은 사진. /페이스북 캡처
    계획은 엇나가고 사고는 잇따른다. 길가에 있는 무화과를 따 먹으려고 폴짝폴짝 뛰다가 넘어져 다치기도 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지름길로 가려다가 지뢰 매설 의심 지대에 진입해 옴짝달싹 못하기도 한다. 올리비에에게 영웅적 면모가 있다면 그것은 인내. 조급하지 않고 차분하다. "모든 게 잘 돌아간다. 예정된 날짜에 베니스에 도착하긴 어렵겠다. 하지만 꼭 베니스까지 가야만 하는가. 여행이 중단된 장소에서 내년에 다시 출발하면 될 일이다. 중요한 건 목적지가 아니라 길 그 자체 아니던가."

    베로나에서 이스탄불까지 걷는 여행 후반부 2000㎞에는 연인 플라테가 본인 시각에서 쓴 여행기가 함께 실렸다. 여성의 시각이 여행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사귄 지 6년 동안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는 두 사람은 여행을 시작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크게 싸운다. 여행이 두 사람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도 관전 포인트.

    4개월 동안 걸었던 2900㎞ 길을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데 3시간 남짓 걸렸다. 플라테는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를 인용하며 여행을 정리한다. "욕망해야 한다. 원해야 한다. 미래를 만들어내기 위해 손을 뻗고 걸어야 한다." 올리비에 같은 강건(强健)의 소유자에게만 허락된 여행은 아닐까. 그는 과거 '나는 걷는다'를 펴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처럼 특별한 재능 없고 소심한 사람도 실크로드를 걸었으니 누구나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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