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하루를 마치고… 티베트 고원의 '차이'같은 달콤한 권태가 밀려온다

  • 정동현 셰프

    입력 : 2017.02.14 15:42

    [정동현 셰프의 '맛있는 책읽기'] 사노 요코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사노 요코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산소가 부족했다. 해발 4000m 위로 올라가자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인도 북부, 티베트 고원의 오래된 도시 '레(Leh)'는 인도의 대표적 휴양지 마날리에서 사륜구동 SUV로 티베트 고원을 가로질러 26시간을 꼬박 달려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고민하기보단 아랫배가 아파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같이 차를 탄 일행의 얼굴도 흙빛이었다. 여행 중 만난 이들과 며칠 같은 생활을 하다 보니 먹고 싸는 리듬마저 같아져 버렸다. 뒷자리에 앉은 일행 중 하나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차 좀 세우면 안 되겠니?"

    고원의 한가운데, 차를 가운데 두고 황무지가 펼쳐졌다. 우리 넷은 모두 차에서 나왔다. 각자 동서남북 방위 중 하나를 맡았다. 그리고 걸었다.

    "너 좀 멀리 가."

    걷기에 지쳐 서로에게 고함을 질렀다. 나는 아주 조금 남은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지키기 위해 걷고 또 걸어 어느 바위틈 사이에 섰다. 그곳엔 나보다 먼저 이곳에 온 이들의 흔적이 널려 있었다. 한숨을 쉬며 바지를 벗고 앉았다. 온몸에 힘을 주는 순간 내 앞으로 큰 버스 하나가 지나갔다. 버스 지붕에 올라간 사람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사람들의 수많은 눈이 나를 향했다.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새해가 열리면 고산 지대를 걷는 기분으로 기운을 짜내 신년 계획을 짠다. 그러다 사노 요코의 에세이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를 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1938년 베이징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석판화를 공부한 사노 요코는 여러 그림책과 에세이를 썼다. 그녀는 어릴 적 지독한 가난 속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로 학업을 이어갔지만 스스로를 동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경박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나는 때때로 주는 생선에 미칠 듯이 기뻐하는 고양이를 보면서 역시 행복은 현실 생활 속에 어쩌다 등장해야 하는 거야"라며 자조하는, 지나치게 솔직한 사람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어떤 교훈을 주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뜯어보고 비뚤어진 유머로 스스로를 비웃을 뿐이다. 그 관조와 냉소가 섞인 글에는 일상의 피로가 느껴진다.

    "거세된 고양이는 한가롭고 평화롭게 살고 있다. 나는 그 한가로움과 평화 때문에 오히려 고양이에게 미안하다. 한가로움과 평화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온몸에 생채기를 새기며 수컷의 삶을 살고 있는 검은 고양이에 비한다면."

    아등바등 하루를 보내고 찌든 사람들 틈에 기대어 돌아오는 퇴근길, 그럴 때 문득 화장기가 싹 지워진 도시의 민얼굴이 보인다. 그러면 인간은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고 하지 못하는 것은 하지 못한다 같은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늦은 밤, 닳디 닳은 몸을 침대에 누이고 열심히 하지 말자는 이 책을 읽으면 인도를 여행하던 시절, 모두 큰일을 보고 차에 돌아왔을 때 차 안에 감돈 침묵처럼 달콤한 권태가 찾아온다. 그날 오후 우리는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 휴게소에 도착했다. 허리가 굽은 노파가 끓여준 걸쭉하고 단맛이 강한 인도식 밀크티 '차이(Chai)'를 마시며 또다시 설산을 바라봤다. 빈 위장에 스며드는 향긋한 단맛에 득도한 듯 미소가 번졌다. 그것이 쾌변 때문인지 차이의 향 때문인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순간을 계속 그리워하게 되리란 것을 알았다. 사노 요코는 여행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제 이곳에 올 일은 다신 없을지도 몰라 하고 생각하는 것이 여행이다."

    오늘을 끝내며 드는 기분도 비슷할 것이다. 이제 다시는 오늘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묘한 노스탤지어. 그러나 또 다른 오늘이 기어코 다시 찾아온다는 사실에 나는 살짝 질리고 만다. 아아, 나는 열심히 하고 싶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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