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서 잡힌 조선인부터 敵을 사랑한 독일 여인까지"

  • 김시덕·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입력 : 2017.03.11 00:26

    영국 전쟁史家 앤터니 비버 역작
    蘇·獨 포로 된 양경종으로 시작, '개인'에 집중한 2차대전史
    1288페이지에 담아낸 전쟁 전모… 치밀하고 섬세한 서술 놀라워

    김시덕·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김시덕·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제2차 세계대전

    앤터니 비버 지음 | 김규태·박리라 옮김
    글항아리 | 1288쪽 | 5만5000원


    올해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인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우랄 산맥 서쪽과 동쪽으로 구성된 제정 러시아의 모든 지역에서 전투가 발생했고, 영국, 프랑스, 미국, 캐나다, 일본 등의 주변 국가들이 혁명을 막기 위해 간섭 전쟁을 펼쳤다. 러시아 혁명을 다룬 책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런 책들 가운데 많은 경우는 우랄 서쪽의 유럽 러시아에 주로 관심을 두고 있다. 볼셰비키 혁명이 발생한 지역이 유럽 러시아였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동서로 긴 러시아 영토 전체를 망라하면서 균형 있게 서술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우랄 동쪽의 시베리아 러시아에서도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수많은 개인 개인이 이 거대한 다큐멘터리의 주역이거나, 조역이거나, 단역이었다. 독립 전쟁을 펼치기 위해 두만강을 넘어간 조선인 김경천 장군도, 러시아 혁명 속에서 볼셰비키와 손잡고 연해주에서 군사 작전을 전개한 바 있다. 이처럼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동부 유라시아 각지로 흩어진 조선인들도 우랄 산맥 동쪽에서 혁명에 휘말렸다. 조선인뿐만이 아니다. 스스로를 북(北)몽골과 남(南)몽골이라 부르는 오늘날 몽골공화국과 내몽고자치공화국의 몽골인들 역시, 러시아 혁명 속에서 독립의 성취와 좌절이라는 엇갈리는 운명을 맞이해야 했다. 이런 희비극은 무수히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책 사진

    그렇기에, 유럽 쪽에 중점을 두고 러시아 혁명을 서술하는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아쉬움을 느낀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E. H. 카가 집필한 '러시아 혁명사' 같은 책들만이, 우랄 산맥 서쪽과 동쪽에서 일어난 일을 균형 있게 서술하는 데 성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서술하려는 사람들에게 던져진 과제는 E. H. 카보다 더욱 어렵다. 러시아를 포함하여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서쪽에 동시에 전개된 수많은 전투를 한 권의 책 속에서 서술해야 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전투를 상세히 적어서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독자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전해주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을 조망하는 큰 틀과 스토리 라인이 필요하다. 즉, 글쓰기 전략을 세워야 한다.

    앤터니 비버가 선택한 전략은 '개인'에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두꺼운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심각성과 그 희생자들을 다룰 때 국가적, 민족적 비극에 관한 모든 통계를 모으려 한다. 그러다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모든 사람의 삶을 예측 불가능하게 바꾸어놓았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7천만명에서 8천만명가량이 사망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전쟁의 전모를 밝히는데 주력하다 보면, 그 숫자 속에 존재하는 한 사람, 한 가족, 한 마을이 망각되어버린다는 말일 터이다. 2011년 3월 11일의 동일본 대지진에 대해 기타노 다케시가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지진을 2만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생각하면, 8만명이 죽은 쓰촨 대지진보다는 그래도 나았다는 식으로, 숫자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의 목숨은 2만분의 1도 8만분의 1도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곳에서는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2만 건 있었던 거다".

    히틀러가 1941년 12월 11일 베를린 크롤 오페라 하우스에 모인 국회의원들 앞에서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다. 이 선전포고로 유럽과 북아프리카에 국한됐던 전쟁은 아시아와 태평양을 포함한 세계 전쟁으로 확대됐다.
    히틀러가 1941년 12월 11일 베를린 크롤 오페라 하우스에 모인 국회의원들 앞에서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다. 이 선전포고로 유럽과 북아프리카에 국한됐던 전쟁은 아시아와 태평양을 포함한 세계 전쟁으로 확대됐다. /글항아리
    그래서 앤터니 비버는 이 책의 첫머리에 노르망디에서 포로로 잡힌 양경종이라는 조선인의 이야기를 배치했다. 일본군이자, 소련군이자, 독일군이었던 조선인 남자. 장동건이 주연한 영화 '마이웨이'의 소재가 됐던 그 사내다. 아마도 한국인 독자들에게는 양경종이라는 남자의 존재가 강렬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이 책 곳곳에 등장하는 수많은 개인 개인의 이야기가 잘 와 닿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앤터니 비버는 이 책의 가장 끄트머리에 어떤 독일인의 이야기를 배치했다. 남편이 동부 전선에 출진한 사이, 자기 농장에 배정된 프랑스인 남자 포로와 사랑에 빠진 독일인 여자. 프랑스 비밀경찰이 1945년 6월에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녀는 프랑스 포로들을 본국으로 데려오는 열차에 몰래 탔다가 붙잡혔다고 한다. 앤터니 비버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라고 말하면서도 한 발짝 더 나아가서, 독자들에게 자신이 상상하는 스토리를 보여준다. "그 여성이 유부녀였기 때문에 애인이 잘못된 주소를 알려주지는 않았을까?" "그 프랑스인 애인도 집으로 돌아와서, 자기가 없는 사이 독일 군인의 아이를 밴 아내와 마주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라고. 독립국이었다가 제국 일본의 일부가 되어 징용된 조선인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프랑스인 포로를 사랑하게 되어 프랑스로 가려 한 독일인 여자의 이야기로 끝나는 전쟁사 책.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모를 망라하면서도 치밀하고 섬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물론 탁월하다.

    하지만 역사학자가 아닌 필자는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 이상으로,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서술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지난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앤터니 비버가 선택한 글쓰기 전략에 감탄했다. 그의 이런 전략 덕분에, 머리말부터 감사의 말까지의 1288페이지를 읽는 것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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