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의 붓 끝에 담긴 김현·김지하·문정희

    입력 : 2017.03.16 03:03

    [소설가 김승옥 畵集 출간]

    절필 후 뇌졸중으로 언어장애… 말·글 대신 그림으로 소통
    고향 순천 모습 담은 풍경화와 문화예술인 초상화 70점 모아

    소설가 김승옥
    회색 생활 한복을 입은 시인 김지하의 짙은 눈썹, 도수 높은 안경 뒤 날카롭던 평론가 김현의 눈매, 원색 스카프를 즐겨 착용한 시인 문정희의 푸근한 미소…. 소설가 김승옥(76·사진)이 한국 문단의 주역들을 그린 초상화가 한자리에 모였다.

    소설 '무진기행(霧津紀行)'의 작가 김승옥이 화집 '그림으로 떠나는 무진기행'(아르테)을 냈다. 1980년 이후 절필 상태에 들어간 작가는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지금껏 언어 장애를 겪고 있지만, 말과 글 대신 그림을 표현 수단으로 선택했다.

    김승옥은 세련된 감성의 문체로 1960년대 소설에 새바람을 일으킨 작가였을 뿐 아니라 그림 솜씨도 빼어났다. 서울대 불문과 재학 시절 일간지에 시사만화를 그려 학비를 조달했고, 1970년대엔 민음사와 문학과지성사의 주요 소설집 표지화를 그렸을 정도였다. 틈틈이 동료 문인들의 초상화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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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옥의 문화예술인 초상화.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황순원, 배창호, 김지하, 서영은. /아르테

    이번 화집은 그가 투병 중에 시작한 풍경화부터 평소 가까이했던 문화예술인들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70여점을 한자리에 모은 것이다. 지난해 여름 서울에서 연 수채화 전시회에 내놓은 작품들이다. 고향 전남 순천의 갯벌과 갈대밭 풍경을 그린 풍경화를 비롯해 서정주 등 주요 문인들의 생가와 문학비를 담은 수채화, 동인지 '산문시대'를 함께 만든 문우들의 젊은 시절 초상화, 소설가 황순원과 시인 황동규 부자, 평론가 이어령의 가족, 소설가 서영은, 시인 김지하, 영화감독 배창호 등의 초상화로 꾸며졌다.

    김승옥은 소설가로 명성을 얻은 뒤 1970년대엔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면서 배창호 감독 등과 함께 한국 영화의 새 물결을 일으키려고 한 적도 있다. 평론가 이어령은 잡지 '문학사상'을 발행하던 1977년 오랫동안 창작을 멀리한 김승옥을 호텔방에 가둬놓고 새 소설을 쓰게 했고 잡지사 직원이었던 소설가 서영은이 그 옆 방에서 감시하도록 했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제1회 이상문학상을 받은 '서울의 달빛 0장'이었다.

    김승옥은 화집을 내며 "그림을 그리는 것은 글을 쓰는 일보다 훨씬 전부터 해왔던 일"이라며 "다행히 '글쓰기'와 '말하기'를 잠시 거두어가신 하느님께서 감사하게도 그림 그리는 일은 허락하셨다"고 밝혔다. 평론가 이어령은 이 화집에 실은 발문에서 "운명은 그에게서 언어를 빼앗아갔지만 그의 점과 선과 색채의 면들을 자아내는 생의 기하학을 침범하지 못했다"며 "오늘 기적처럼 우리는 김승옥의 글이 아니라 이 그림들과 만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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