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의 고독'이냐, '백 년 동안의 고독'이냐

    입력 : 2017.04.08 00:43

    ['번역가의 대부' 라바사 회고록]

    노벨문학상 마르케스 "원본보다 영어 번역본 좋아"
    번역은 같은 곡 다르게 연주하기… 문법때문에 직감 희생하면 실패

    번역을 위한 변명

    번역을 위한 변명

    그레고리 라바사 지음ㅣ이종인 옮김
    세종서적ㅣ292쪽ㅣ1만6000원

    "'백 년의 고독'이냐 '백 년 동안의 고독'이냐."

    번역가 그레고리 라바사(1922~2016)는 햄릿에 버금가는 고민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1970년 훗날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영어로 번역할 때였다. 불특정한 100년을 의미하는 'A Hundred'인지 특정한 100년을 뜻하는 'One Hundred'인지 스페인어는 암시할 뿐 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직감에 따랐다. 'one'을 선택했다. 답은 작가에게서 왔다. 라바사에게 번역을 맡기기 위해 3년을 기다려야 했던 마르케스는 스페인어 원본보다 영어 번역본이 더 맘에 든다고 찬사를 보냈다. "라바사의 번역은 원서를 통독한 다음 그냥 책상에 앉아서 그 원서를 영어로 아예 다시 쓴 것 같다."

    192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라바사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영어로 번역하며 '마술적 리얼리즘'이 세계로 퍼져 나가게 한 주역. 그가 번역한 27명의 스페인어·포르투갈어권 작가 중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과테말라·1967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콜롬비아·198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페루·2010) 3명이 노벨문학상을 탔다. 이 책은 '번역가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그가 2005년 펴낸 회고록이다.

    책은 어쩌면 예상 가능한, '번역자는 반역자'라는 익숙한 이탈리아 경구로 시작한다. 다른 두 언어가 완벽하게 같은 뜻을 가지는 번역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베드로(반석)라는 뜻이 담긴 프랑스어의 pierre(돌)가 영어 stone과 같은 느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독자들의 문화적 배경 차이도 번역을 어렵게 한다. 라바사는 미국 뉴요커에게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 잠자가 어떤 벌레로 변했느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바퀴벌레'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한다. 카프카는 풍뎅이를 생각하며 '흉측한 벌레'라고 썼지만 도시인은 바퀴벌레부터 떠올리게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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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 Images Bank

    라바사는 번역은 '학습된 본능'으로 하는 것이며 '확신 있는 직감'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르기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끊어낸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번역가가 두려움 때문에 문법을 중시하고 직감을 희생할 때 더 큰 반역을 저지르게 된다." 그는 이미 몇 번 통독했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책을 처음 읽으면서 동시에 번역해나갔다. 그래야 독자도 책을 처음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

    작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 '채식주의자'의 소설 첫 문장과 데보라 스미스가 영역한 영문은 다른 문장으로 보인다.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모든 면에서 특별한 점이 전혀 없다고 쭉 생각해왔다(I'd always thought of her as completely unremarkable in every way.)" 국내에서 벌어진 논쟁을 라바사가 봤다면 그는 번역가의 직감과 본능을 지지했을 것이다.

    번역가 그레고리 라바사
    번역가 그레고리 라바사

    그에게 어떤 책이 '오역이 적은 정본'이냐는 논의는 무의미하다. 번역은 그에게 '같은 곡을 다른 악기로 연주하는 것'이다. 2015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23)의 연주와 1985년 같은 콩쿠르 우승자 스타니슬라브 부닌의 쇼팽 해석이 다르다고 해서 두 사람 중 한 명이 '쇼팽을 왜곡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책은 라바사가 자신의 번역 철학과 개인사를 설명하는 1부와 번역 작업 과정을 정리한 2부로 나뉜다. 전문번역가가 아니라면 2부에서 이미 읽었거나 관심 있는 작가의 책을 어떻게 번역했는지부터 읽는 것을 권한다. 그는 미식가 같은 까다로움을 발휘하며 단어를 고르고 또 고른다. 본능과 직감을 신뢰하라는 말이 제멋대로 번역하라는 뜻이 아니란 증거. 미국 잡지 '뉴요커'가 '족장의 가을'이라는 마르케스 소설을 실으면서 잡지 역사상 처음으로 '똥(shit)'이라는 단어를 지면에 등장시킨 일 같은 소소한 일화도 담았다. 꼭 이 단어를 써야 한다고 고집한 라바사는 '노벨상 수상보다 더 큰 승리'라고 뽐낸다.

    영어와 스페인어, 포르투갈어가 수시로 튀어나온다. 언어에 대한 이해가 재미와 비례한다. 원제는 '이것이 반역이라면(If This Be Tre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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