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한 찰나'의 독서… 벚꽃보다 좋은 책, 벚꽃 아래 읽는 책

      입력 : 2017.04.15 00:04

      꽃이 피고 지는 시간만큼의 人生

      소설가 김연수의 추천 '벚꽃 동산'

      '벚꽃 동산'
      '벚꽃 동산' | 안톤 체호프 지음 | 홍기순 옮김 | 범우 | 183쪽 | 8000원

      한 친구가 일하다 말고 전화하더니 벚꽃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다. 중년 사내의 뜻밖의 수다에 반갑다는 마음이 앞섰다. 세상이야 어떻든 봄이 되면 어김없이 벚꽃은 피니 참 다행이다. 그렇게 전화를 끊었는데, 좀 있다가 그 친구에게서 체호프의 '벚꽃동산'을 읽어봤느냐는 문자가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얘기만 많이 들었을 뿐 읽어본 적이 없어 오래전에 사뒀던 화사한 표지의 책을 펼쳤다. 집에 앉아 읽어도 좋겠지만, 벚꽃 아래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 책을 들고 어슬렁어슬렁 근처 공원으로 나갔다.

      그러나 역시 그토록 만개한 벚꽃 아래에서 꽃을 안 보고 활자를 본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나의 방으로 돌아오니 오늘 새벽에 창백한 달이 지나간 서쪽 하늘로 주황색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하얀 벚꽃들이 여전했다.

      이 몽롱한 풍경화는 미세 먼지가 그려낸 것이다. 전등을 밝히고 '벚꽃동산'을 펼치니 파리에서 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안드레예브나의 이런 대사가 눈에 들어온다. '오, 나의 순수한 어린 시절! 바로 이 어린이 방에서 잠을 자며 또 여기서 동산을 바라보았지. 아침이면 행복에 젖어 잠에서 깨곤 했어. 그때도 동산은 이랬어.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정말 온통, 온통 하얘! 오, 나의 동산! 어둡고 음산한 가을과 추운 겨울을 겪고도 너는 다시 젊고 행복에 넘치는구나. 하늘의 천사들도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소설가 김연수
      '그러게. 나의 어린 시절도 순수했는데…'라고 생각하며 그 대사에 밑줄을 그었다. 벚꽃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 벚꽃들은 내게 그리고 책 속 안드레예브나에게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세상이 늘 그대로인 것처럼. 나는 조금도 늙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그럴 리가. 어린 시절 나의 부활절 무렵 하늘은 결코 이런 빛이 아니었다. 그런 나날들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든 것일까? 어느 부분에선가 어떻게 이렇게 나이가 들었는지 의아해하는 극 중 인물을 향해 상인 로빠힌이 "시간은 흐른다고요"라고 말하지만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그런 식이다. 벚꽃동산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그 현실을 보지 않았을 뿐이다.

      짧은 체호프의 희곡이 아쉬워 읽다 만 에르베 기베르의 '유령 이미지'를 마저 읽었다. 사진과 이미지에 관한 이 아름다운 산문집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나는 스물네 살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내 과거의 이미지는 이미 나에게는 거의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감추려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들이 그 이미지를 사랑할까 봐 두렵고, 그들이 거기에서 멈출까 봐 두렵다.'맞다. 스물네 살에도 우리의 얼굴은 이미 충분히 늙어 있었다. 하물며 지금에야. 벚꽃이 피었다가 지는 사이. 때로는 인생의 길이가 그 정도쯤인 듯하다.

      /Getty Images Bank

      삶이 피곤해서 심리치료 받으러 온 神

      만화가 이현세의 추천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 한스 라트 지음 |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316쪽 | 1만2800원

      인간들이야 격 떨어지는 짓들을 하든 말든, 때가 되니까 올해도 벚꽃이 환하게 웃으며 찾아왔다.

      솜사탕처럼 희고 눈부신 함박웃음은 매년 즐겨도 또 경이롭다.

      그 벚꽃 길을 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려오고 밀려갔다. 저 많은 사람들은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가는 것인가. 앓고 일어난 다섯 살배기 아이처럼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어디서 왔고 얼마나 살 것이며 또 어디로 가는 것인가. 무한한 우주에서 한 점 티끌조차 되지 않는다는 내 존재를 절감하는 순간, 신이 내게로 왔다. '신이 없더라도 우리는 신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라는 볼테르의 말처럼 젊은 열병은 신을 필요로 했다.밀려오고 밀려가는 사람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다. 예전이면 카메라와 책이 쥐어져 있어야 할 손. 저 만능 '스마트폰' 속에 신의 존재에 대한 답은 있을까. 실없는 웃음. 이 슬픈 봄날, 벚꽃에 취하고 '스마트폰'에 취한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 천지창조를 마친 다음 날, 신은 어디로 가야 했을까. 갑자기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골칫거리를 만들어 냈음을 깨닫고 혹시 심리상담소를 찾지 않았을까 대답하는 '깜찍한' 소설이 있다. 한스 라트(52)라는 독일 작가가 쓴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다.

      내일 당장 자살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이혼한 파산 직전의 심리치료사 야코비. 어느 날 아벨 바우만이라는 서커스 꼭두각시 차림의 사내가 그에게 찾아온다. 삶이 너무 피곤하고 괴로워서 심리 치료를 받고 싶다는 이 익살스럽고 능청스러운 사내는 자기를 신이라고 소개한다.

      만화가 이현세
      인간의 몸을 빌린 이 신은 인간의 고민은 기본이고, 자신을 무시하는 혼외자식과의 갈등에 힘들어하며, 무엇보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폭주기관차처럼 달려가는 인간을 보며 무기력 때문에 질식 직전이다. "농사나 화훼에 소질이 없으면 공부나 해야 한다"는 농촌 도시 슈트랄런에서 태어난 작가는, 어릴 때는 공부밖에 한 게 없었고, 대학에서 철학·문학·심리학을 두루 공부했다. 졸업 후, 주유원, 건설노동자, 무대기술자, 연극평론가 등을 전전하다가 마흔 살에 작가의 길로 뛰어들었다. 경쾌한 문체와 빠른 호흡, 재치 있는 입담, 흡인력 있는 스토리 전개가 특징이다. 이 소설 첫 문장은 '전처가 한밤중에 문 앞에 서 있다'. 전처·한밤중·문 앞 등의 자극적 단어 조합이 이미 눈길을 끈다. 소설 각 장의 제목도 이런 식이다. 신은 웃긴다, 신은 속수무책이다, 신은 어딘가로 가는 중이다, 신은 좌절한다, 신은 괴로워한다…. 이처럼 '신은 존재하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무겁고 궁극적인 질문을 한스 라트는 유머와 놀라움으로 가득 찬 이야기로 바꾸어 우리를 즐겁게 한다.

      이 봄날, 벚꽃이 지고 나면 또다시 무거운 짐을 질 우리에게 한스 라트의 이 한 권의 놀라운 이야기를 권한다. 이 정도로 익살스럽고 능청스러운 신이라면 고달픈 삶도 결코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역자의 말과 함께.


      아툴 가완디의 죽음에 관한 1급 르포

      소설가 장강명의 추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 아툴 가완디 지음 | 김희정 옮김 | 부키 | 400쪽 | 1만6500원

      흰 꽃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참 걷다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한바탕 꿈을 꾸고 난 듯한 기분이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꽃잎 폭포를 보고 있노라면 아름다움과 허망함에 가슴께가 싸하다.

      그럴 때 죽음을 생각한다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느낀다.' 사무라이 미학 따위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 몇 발짝만 더 걸으면 피안(彼岸)에 이를 것만 같은 두렵고 떨리는 감정이다.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아내와 벚꽃놀이를 하다 터무니없는 생각에 몇 번인가 심장이 철렁했다. 어느 순간 옆을 돌아보면 우리 둘 중 한 사람은 나무 옆에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꽃잎과 함께 붙잡을 수 없는 세계로 넘어가 버린 건 아닌지….

      남들은 벚꽃을 격렬한 찰나라고 하는데, 내게는 오히려 낙화의 시간이 과하게 길게 느껴진다. 개화와 만발은 대충 건너뛰고 소멸의 순간에 집중하는 심란한 슬로모션. 사람의 '자연사' 역시 그렇게 천천히, 하지만 손 쓸 수 없이 확실하게 저무는 모양새라는 사실을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고 알았다.

      노환으로 시력을 잃은 아내를 간호하는 남편이 있다. 그들은 손잡고 걷고, 껴안고 잤다. 90대인 남편은 아내를 돌보는 것이 자기 삶의 이유라고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귀마저 들리지 않게 됐다. 두 사람은 어떻게도 더는 소통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무너졌고 남편도 황폐해졌다.

      책에 나오는 한 사례다. 삶과 죽음 사이에 그런 으스스한 단계가 있는 것이다. 의사이자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100인' 중 한 사람이기도 한 저자는 그 스산한 중간지대를 파고든다. 짓밟혀 색을 잃고 뭉개지는 모습까지 기어이 내보인다.

      소설가 장강명
      우선 르포르타주로서 일급이다. 벅차고 뭉클한 대목이 한두 곳이 아니다. 노화와 죽음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 그럼에도 그 폭력에 맞서 인간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절절히 보여준다.

      동시에 의료 기관과 노인 요양 시설,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 전반에 대전환을 촉구하는 논쟁적인 정책 제안서다. 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되고 정신마저 온전히 장악할 수 없게 됐을 때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위해, 또 독립과 자존을 지키기 위해 당신은 어떻게 싸우겠느냐고 묻는 섬뜩한 철학책이기도 하다. 저자가 허울 좋은 도피를 절대 옹호하지 않는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무엇보다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실용서다. 줄기에서 떨어져 지면까지 내려오는 시간 동안 고민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에 대해, '공격적 치료'가 무엇을 약속하고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에 대해 설명해준다.

      굳이 시기를 정한다면 벚꽃 지는 계절에 읽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여름에 펼치면 몰입이 어려울 것 같고, 겨울에 붙잡고 있기엔 다소 어둡다. 딱 벚꽃이 지는 동안 시작해서 마칠 수 있는 분량이다. 꽃 비를 맞으며 읽든 지붕 아래서 읽든 책장을 덮고 나면 주변 풍경이 달리 보이리라 장담한다.


      열흘 전 술 마시러 나가고 빈 침대만…


      안대회 교수의 추천 '서리맞은 단풍잎, 봄꽃보다 붉어라'

      '서리맞은 단풍잎, 봄꽃보다 붉어라'
      '서리맞은 단풍잎, 봄꽃보다 붉어라' | 유병례 지음 | 뿌리와이파리 | 376쪽 | 1만8000원

      올해도 어김없이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 꽃구경 명소에 나가봤더니 상춘객으로 넘쳐난다. 작년에도, 그 전해에도 늘 그곳은 꽃이 흐드러졌다. 올해 꽃이라 해서 특별히 더 아름다운 것도, 더 달라진 것도 아닌데 마음이 싱숭생숭 몸이 들썩인다. 산수유·매화·개나리·벚꽃으로 이어지는 꽃들에 그동안 무뎌진 감성이 다시 되살아난 기분이다.

      그 꽃들의 향연에 취할 무렵 읽기 좋은 책의 장르로 시집이 빠질 수는 없다. 이번 봄에는 유병례 교수가 해설한 '서리맞은 단풍잎, 봄꽃보다 붉어라'를 집었다. 책을 펼치자 바로 다음 시가 보인다.

      강가에 핀 봄꽃 내 마음 마구 흔들어놓아
      江上被花惱不徹(강상피화뇌불철)

      그 아름다움 말해줄 데 없어 미칠 것 같네.
      無處告訴只顚狂(무처고소지전광)

      남쪽 마을 술친구 찾아 허겁지겁 달려갔더니
      走覓南愛酒伴(주멱남린애주반)

      열흘 전 술 마시러 나가고 빈 침상만 홀로 있네.
      經旬出飮獨空床(경순출음독공상)


      안대회 교수
      두보(杜甫)의 시로 '강가에 홀로 거닐며 꽃구경 나섰다'란 제목이다. 두보가 요새 서울을 다녀갔나 생각할 만큼 집 밖으로 치달리는 들뜬 마음을 대신 말해놓았다. 봄꽃이 두보의 마음을 완전히 흔들었나 했더니 그 친구는 벌써 열흘 전부터 넋이 나가 있었다. 두보의 허망함이란!

      이 책에는 이렇게 봄철의 꽃구경을 읊은 시를 비롯하여 서정이 넘치는 한시를 풀이하였다. 눈에 익숙한 작가의 시부터 낯선 시까지 저자가 오랫동안 시를 강의하면서 남에게 소개하고 싶었던 작품 위주로 뽑고 해설하였다. 유 교수의 시를 뽑고 해설하는 작업에는 믿음을 갖고 있었는데 이 책 역시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다. 요즘 분위기에 어울리는 시가 많다.

      여성 시인 설도(薛濤)의 '춘망사(春望詞)'란 시가 있다. 봄과 꽃을 한없이 원망한다.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 화사한 꽃은 꽃이 아니라 차라리 가시이기 때문이다. 벚꽃을 볼 때에는 단지 짧은 며칠만이라도 시집을 집어 그 안의 감성에 마음을 선뜻 허락해도 좋겠다. '춘망사'를 즐겨 보시길.

      아 어찌하랴 흐드러지게 핀 꽃가지
      那堪花滿枝(나감화만지)

      도리어 그리움만 돋우어 놓으니.
      作兩相思(번작양상사)

      아침에 거울 보며 눈물 흘리는 내 마음을,
      玉簪垂朝鏡(옥잠수조경)

      봄바람아 넌 아느냐 모르느냐.
      春風知不知(춘풍지부지)



      멋진 펜으로 그린 작은 숲, 봄이다


      그림책 작가 백희나의 추천 '리틀 포레스트 1·2'

      '리틀 포레스트 1·2'
      '리틀 포레스트 1·2' | 이가라시 다이스케 지음 | 김희정 옮김 | 세미콜론 | 1권 170쪽·2권 184쪽 | 각 9000원

      요즘 통 책을 읽지 못했다. 깨알 같은 글자를 열심히 쫓아 봐도 눈으로만 읽어내려갈 뿐 머릿속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마음속까지는 더더욱 먼 길이라 기미조차 없다. 이 아름다운 봄날, 벚나무 아래에서 읽을 만한 책이라.

      흩날리는 꽃잎과 함께 마음마저 들어올 수 있는 책이 뭐가 있을까. 책 안에서라도 여백을 찾을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내용 면에서도 시각적인 면에서도. 그렇다면 만화책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멋진 펜화로 그려진 귀농 생활을 하는 여자 아이의 이야기이다. 숲이 깊은 외딴 농가에서 살아가는지라 독백처럼 이어가는 조용한 대사가 텍스트의 대부분이다. 느릿느릿 바지런히 계절을 넘기며 먹을 것을 키우고, 저장하고, 요리를 한다.

      곳곳의 회상 장면을 통해 이치코의 짧았던 도시 생활이 혹독했음을 알 수 있을 뿐 별다른 플롯은 없다. 계절에 따라 풀과 열매, 벌레, 산짐승이 등장한다. 굳이 극적인 부분을 찾자면 주인공이 아직 중학생일 적 엄마가 말없이 집을 나가버린 정도? 엄마의 가출은 그 이유도, 그 후의 결과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책 마지막 부분에 엄마의 편지가 도착한다. "무언가 실패를 하고 되돌아볼 때마다 난 항상 같은 일로 실패를 하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같은 곳을 뱅글뱅글 원을 그리며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어서 침울해지고… 하지만 난 경험을 많이 해봤으니까 그게 실패건 성공이건 완전히 같은 장소를 헤매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 '원'이 아니라 '나선'이라고 생각했어. 맞은편에서 보면 같은 곳을 뱅글뱅글 도는 것처럼 보여도 분명히 조금씩은 올라갔든지 내려갔든지 했을 거야. 그럼 조금은 더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더 힘을 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림책 작가 백희나
      엄마처럼 이치코도 잠시 사라지기로 하나 보다. "적극적으로 살 곳을 선택하고 싶어서"라며 야무지게 친구에게 양파밭을 부탁하고 떠난다. 극적인 플롯 없이 덤덤한 시골 생활의 묘사와 사라진 엄마 그리고 이치코의 변화된 마음을 멋지게 섞어 근사한 만화로 요리해냈다.

      한 장면을 소개한다. '이러면 다 얼어버리는데…' 저장해뒀던 고구마는 전부 얼어서 못 먹게 됐다. 스펀지처럼 돼버렸다. 호박은 간신히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은 실망하지 않고 감주를 담그기 시작한다. 죽을 끓여 식혀둔 뒤 된장 누룩을 섞고, 일본식 간이 난방 기구 유탄포와 종이 박스, 모포로 하룻밤 보온. 다음 날 아침 다시 한 번 따뜻하게 데워 누룩을 활성화시킨다. 오후가 되면 감주가 완성되어 있다. 주인공이 말한다. "요 며칠 동결 방지를 위해 오후에도 물을 계속 틀어놓고 있다. 한낮에도 영하의 날씨가 일주일이나 계속되면 그 후에 드디어 봄이 찾아온다. 앞으로 조금만 더 있으면 된다."

      그렇다. 앞으로 조금만 더 있으면 될 것이다. 혹독했던 겨울을 잘 견뎌낸 우리에게 청명한 공기를 선사해줄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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