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지 기억하는 '푸네스'라면 삶이 얼마나 지옥일까

    입력 : 2017.06.10 00:59

    브라질 신경생물학자 이반, 망각의 작동방식 체계적 설명
    우리 뇌는 기억을 취사선택… 필요하다면 거짓 기억 만들기도
    "기억력 유지하려면 독서가 필수"

    망각의 기술

    망각의 기술

    이반 이스쿠이에르두 지음ㅣ김영선 옮김
    심심|236쪽|1만4000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청문회와 법정은 망각의 장. '편리한' 답변이라 생각하지만 이들이 정말로 기억을 잊은 것이라면 어떨까? 13편의 논문이 각각 100회 이상 인용된 브라질의 대표적 신경생물학자 이반 이스쿠이에르두(80)는 말한다. "뇌는 우리에게 이익이 되도록, 의지의 어떤 관여도 없이 단독으로 망각의 기술을 행한다." 이들이 정말 '사실'을 말하고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뇌가 단기기억(지속시간 6시간 미만)과 장기기억(6~24시간)을 구별한다는 것을 밝히는 데 공헌했던 저자는 책에서 인간 기억, 그중에서도 망각의 작동 방식을 설명한다.

    그는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 이야기를 언급하며 책을 시작한다. 사고로 특정한 날 하늘에 뜬 구름 모양 같은 자질구레한 일까지 완벽하게 기억하는 농부 이야기다. 천재적 기억이 부러운가. 푸네스 입장에서 머릿속에 빼곡하게 쌓이는 정보는 괴로울 뿐이다.

    인간은 뇌에서 기억을 꺼낸다. 문제는 쓰이지 않는 기억은 새로운 기억을 위해 정리돼야 한다는 것. '오늘 주차한 곳을 기억하기 위해 이틀 전 어디 주차했는지는 잊어야 한다'는 말이다. 용량이 부족한 컴퓨터나 스마트폰 저장 공간을 관리하는 것과 닮았다. 용량 운용 방식은 더 닮았다. 하드디스크에서 파일을 삭제하면 대부분 실제로 지우는 대신 '이 공간을 필요할 때 지워도 된다'고 표시하고 끝낸다.

    뇌는 오늘 주차한 곳을 기억하기 위해 이틀 전 어디 주차했는지를 알아서 잊는다. 그런데 이 ‘망각 기능’은 때로 본인도 모르게 기억을 뒤바꾼다.
    뇌는 오늘 주차한 곳을 기억하기 위해 이틀 전 어디 주차했는지를 알아서 잊는다. 그런데 이 ‘망각 기능’은 때로 본인도 모르게 기억을 뒤바꾼다. /Getty Images Bank

    뇌도 마찬가지. 사라졌던 기억이 '마들렌' '첫사랑 사진 한 장' 따위로 떠오르는 이유는 실제 기억이 세포 차원에서 물리적으로 소멸한 것이 아니라 평소 떠올리지 않도록 '망각의 기술'로 막아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와중에 어렸을 때 어머니 품에서 젖을 먹던 기억이 갑자기 튀어오르면 도저히 시험에 집중을 못 할 것 아닌가. 망각의 기술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다.

    대부분의 기억은 네 종류 망각의 기술에 따라 일상생활에서 우리도 모르게 상실된다. '습관화'의 기술로 익숙한 자극은 가볍게 무시해 넘기고, '차별화'는 중요한 일만 남기고 나머지는 잊는다. 어떤 기억에는 반응을 '소거'하고, 정말 괴로운 기억은 '억압'하는 식의 기술도 있다.

    공교롭게도, 미국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개디스 역시 저서 '역사의 풍경'에서 푸네스 이야기를 인용했다. 개디스는 넘쳐나는 사료를 푸네스의 기억력에 비유하며 '신호'와 '소음'을 구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바꿔 말하면, 뇌가 자동으로 기억을 취사선택한다는 이스쿠이에르두의 주장은 우리가 모두 각자의 역사를 쓰고 있다는 뜻이다.

    팩트를 무의식 수준에서 취사선택하는 우리 뇌는 매일같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특히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뇌가 변조한다는 지적이 그렇다. "대개 거짓 기억은 뇌가 단독으로 만들어낸다. 진짜 기억을 완전히 또는 일부 지워야 하기 때문에 거짓 기억은 망각의 한 형태이다." 뇌는 불성실하고 신뢰하기 어려운 사가(史家)라는 뜻이다.

    그래서 저자는 망각을 이야기하면서도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더 나은 기억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다수의 브라질인과 영국인이 지난 선거에서 누구에게 표를 던졌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러시아인은 1900년대 초 러·일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학교에서 배우지만 성인이 되면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연구 등을 예시로 든다. 그는 "주의력이나 관심이 부족한 결과 기억이 취약해 사라졌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완전한 민주주의의 실천은 분명히 이보다 훨씬 더 나은 기억력을 요구한다"고 썼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고 했던 밀란 쿤데라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더 나은 기억력을 위한 저자의 처방은 '독서'. "기억을 훈련해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읽고, 읽고, 또 읽는 것이다. 읽는 것만큼 많은 유형의 기억을 완전히 동원하는 일은 없다." 기억을 형성하는 데 사용하는 많은 양의 시냅스를 동시다발적으로 활성화하는 거의 유일한 활동이 읽기라는 것이다.

    제목을 보고 잊고 싶은 기억을 잊는 구체적 지침을 주는 가이드북이라고 생각했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밤중에 이불을 걷어찰 정도로 부끄러운 기억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니, 레테의 강을 애써 찾을 필요는 없다. 저자는 썼다. "우리가 무엇을 망각하는지는 무엇을 기억하는지 만큼이나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준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