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내리고 싶었던 대서양 비행… 이 책이 나를 구했다

  • 정유정·소설가

    입력 : 2017.07.06 20:44

    책 표지 이미지

    스토리텔링 애니멀

    조너선 갓셜 지음|노승영 옮김|민음사|293쪽|2만2000원

    지난겨울, 나는 런던에서 LA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내 좌석은 중앙 열 가운데였고, 양옆엔 덩치가 덤프트럭만 한 남자들이 앉았다. 앞자리의 남자는 좌석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30분도 되지 않아 나는 그만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 됐다. 영화, 음악, 명상, 심호흡.

    좌우전방의 압박을 견디느라 별짓을 다 하던 중 문득 기억이 났다. 배낭에 책 두 권이 있다는 게. 하나는 영국 작가의 소설, 하나는 미국 학자의 인문학서. 별 고민 없이 소설을 펼쳤다. 동시에 내 무릎에 견과류 봉지가 툭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스튜어디스가 간식 차를 밀며 통로를 지나고 있었다. 머리 뚜껑이 뽕, 열리는 기분이었다. 이 무슨 무례한 실제로는 ‘짹’ 소리도 못해봤다. 그러기엔 ‘영국 언니’의 덩치가 너무 컸다. 그 옛날 아버지는 동네 아이와 한판 붙었다가 묵사발이 돼 돌아온 내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얻어맞을 게 확실하면 싸우지 마라.” 나는 영국 소설을 던져버리고 미국 학자의 책을 꺼냈다. 복수심에 불타 파트너를 바꾸는 건 연애할 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인간은 이야기의 동물이다.” 조너선 갓셜은 ‘스토리텔링 애니멀’의 서두에서 인간이 ‘호모 픽투스’임을 선언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기갈이 들린 것처럼 이야기를 먹어치우며 산다. 술집과 뒷담에선 허풍과 소문을 말하고 듣는다. 서점과 도서관, 교실에선 쉴 새 없이 책장이 넘어간다. 극장에선 끊임없이 영화가, TV 채널은 온갖 장르의 드라마가 각축을 벌인다. 언론에선 ‘기사’라는 이름의 이야기를 24시간 쏟아낸다. 스포츠는 승자를 주인공 삼은 서사시적 영웅 드라마를, 종교는 미확인 존재에 대한 숭배 서사를 판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까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억을 통해 몽상을 통해 꿈을 통해. 인간은 14초짜리 백일몽을 하루 평균 2000번씩 꾼다. 인생 대부분을 자기만의 극장에서 보내는 셈이다. 어디 그뿐일까. 이야기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계와 인간과 삶을 내다본다. 연대기적 구성과 인과성이라는 이야기적 방식을 통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인다. 현상에 대한 해석, 역사에 대한 이해, 인간과 세계의 상호작용, 하다못해 지난밤 꿈까지. 말이 안 되면 말을 지어서라도 말이 되게 만들고야 만다. 왜 그럴까?

    이 책은 바로 ‘왜 그럴까?’에 대한 갓셜의 답변이다. 문학과 인지과학, 심리학, 뇌 과학, 진화심리학을 종횡무진 오가며 이야기가 진화적 적응인 이유에서부터 온갖 ‘말썽’이 이야기의 소재가 되는 이유, 음모론이 생겨나는 이유, 인간이 거짓말 선수인 이유, 기억이 부정확한 이유 등을 설명해간다. 그 설명이 전혀 설명적이지 않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형식과 내용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이야기로 풀어가는 그의 솜씨는 시쳇말로 ‘끝내준다’. 낄낄 웃다, 고개를 끄덕이다, 찔리는 마음으로 ‘나’의 어두운 배 속을 더듬으며 마지막 장에 도달했을 때, 비행기도 LA공항에 도착했다. 덕택에 나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리지도, 영국 언니와 싸우지도 않았다. 평소의 낙천적인 나로 돌아왔고 미국에서의 일정을 즐길 준비가 돼 있었다. “이야기를 하고 듣는 우리의 아름다운 능력을 찬양하라”는 그의 결론은 결단코 옳았다. 악몽이었을 열두어 시간을 우주로 보내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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