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만큼의 보드카를 마시고 떠난 詩人

  • 임지현·서강대교수·서양사

    입력 : 2017.07.06 20:41

    책 표지 이미지

    어느 시인의 죽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안정효 옮김|까치|269쪽|1만1000원

    휴가 가서 혁명을 읽으라고? 이렇게 반문하는 독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렇다는 게 내 대답이다. 휴가가 일상으로부터의 망명이라면, 100년 전의 혁명 속으로 내적 망명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바닷가의 파라솔이나 산장의 호롱불 아래라고 해서, 혁명을 읽으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에 드리운 이념적 분란을 생각하면, 어깨에 힘을 좀 빼고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읽는 게 더 온당할지도 모르겠다.

    파스테르나크의 이 독특한 자서전은, ‘빨갱이 몰이’에 익숙한 싸구려 보수나 러시아혁명이 21세기 한반도의 미래였다는 순진한 몽상가들에게 모두 불편한 역사의 편린들을 드러내 준다. 혁명 자체로는 선할 것도 악할 것도 없는 것이다.

    가족의 친구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기차 안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톨스토이에게 인생과 문학에 대해 듣고 스크리야빈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배운 파스테르나크의 어린 시절을 읽다 보면, 누구도 혁명 전야의 문화적 고결함을 부정할 수 없다. 문화의 적은 혁명이 아니라 반(反)혁명인 것이다.

    혁명 러시아를 문화적으로 고양시킨 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미래파와 표현주의 등 사회주의 아방가르드의 실험정신이었다. 파스테르나크의 자서전은, 샤갈과 말레비치가 작은 시골 읍내 비테프스크에서 자웅을 겨루고 마야콥스키가 미래파 시인들을 몰고 다니며 혁명의 문화적 전위를 자임했던 그 흥분의 시대를 차분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그 차분함이 묘하게도 ‘흥분을 다져 갈아 앉힌 감격’을 선사한다. 1980년대 초 암울하기 짝이 없던 5공 시절, 나는 자주 파스테르나크의 이 차분한 혁명 속으로 내적 망명을 떠났다.

    1920년대 혁명 러시아를 풍미했던 지적 자유와 풍요로운 실험이 스탈린의 단순무지한 예술의 잣대로 사정없이 난자당하면서, 혁명은 삼류 드라마로 전락했다. “동생 루디야와 올랴에게는, 난 이제 갈 곳이 없다고 전해주세요”라고 어머니에게 보낸 시를 마지막으로 권총 자살한 마야콥스키를 처음 만난 것도 파스테르나크의 이 책에서였다.

    마야콥스키의 왕방울만 한 눈은 희미한 사진에서도 충분히 느낄 만큼 형형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훗날 바르샤바에서 폴란드의 문학평론가 알렉산데르 바트의 자서전을 읽다가, 다시 권총 자살한 그 시인을 만났다. 바트는 미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길에 바르샤바에 들른 마야콥스키를 소련 대사관에서 만났다.

    마야콥스키는 바트와 ‘바다만큼 많은 양의 보드카’를 마셨다. 한껏 취하고는 주머니에서 달러화를 뭉치로 꺼내 대사관 지하의 당구대 위로 마구 흩뿌렸다는 것이다. 시인을 무마하느라 미국 여행이나 하고 오라며 후하게 돈을 쥐여준 스탈린의 반혁명을 한껏 술에 취해 던져버린 것이겠지. 마야콥스키가 죽었을 때, 혁명은 이미 죽은 것이다. ‘어느 시인의 죽음’은 그러니까 ‘혁명의 죽음’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인간의 삶이 시장의 원리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믿는 시장주의자들이나 볼셰비즘이 인류의 미래 청사진을 제공했다고 믿는 국가주의자들에게 파스테르나크나 마야콥스키가 큰 의미로 다가올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휴가철에 ‘어느 시인의 죽음’을 읽는다면, 일상을 던져버리듯 냉전적 틀을 던져버리고 100년 전 러시아혁명의 숭고함과 비루함을 추체험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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