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당, 외세 이용해 정권 잡고 사회 바꾸려했다"

    입력 : 2017.07.12 00:28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출간… 김종학 동북아 역사재단 연구위원]

    日·英 당시 외교 문서 토대로 김옥균·오경석 등 언행 분석
    "'실학 계승한 개화 사상' 허구"

    1874년 3월 6일 조선에서 온 연행사의 역관(譯官)이 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관의 메이어스 참사관을 비밀리에 방문했다. '외부 사정을 알고 있고 외국 물건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은 극소수 조선인의 하나'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소수 가문이 고위 관직을 독점하는 조선의 신분제에 강한 불만을 드러낸 뒤 "조선 사회의 변화는 오직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3월 27일 다시 찾아온 그는 유럽 열강이 군대를 동원해서 조선 정부의 은둔 체제를 포기시켜 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76년 1월 조선과 수호조약을 맺으려 일본 군함들이 강화도를 침범했을 때 통역을 맡은 그는 일본에 조선의 내부 사정을 알려주고 강화도에 상륙해서 무력을 과시하라고 부추겼다.

    조선의 변화는 외부 충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그들과의 '내통'도 서슴지 않았던 이 인물은 오경석이었다. 중국을 10여 차례 왕래하면서 세계 정세를 깨닫고 신사상을 품게 된 그는 친우(親友)였던 한의사 유대치와 생각을 공유했고 1871년 무렵 김옥균·박영효 등 양반 자제와 승려 이동인을 포섭하면서 비밀결사 개화당이 만들어졌다.

    김종학 연구위원은“한정된 사료로 과다하게 개화당의 시각에서 평가된 19세기 후반 역사를 사실에 입각해서 재조명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종학 연구위원은“한정된 사료로 과다하게 개화당의 시각에서 평가된 19세기 후반 역사를 사실에 입각해서 재조명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박상훈 기자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일조각)를 펴낸 김종학(40)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오경석·김옥균·이동인 등이 접촉했던 일본·영국·중국·미국·프랑스 외교관들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를 통해 개화당의 형성 과정과 행적을 추적했다.

    외국 외교 문서들에 담긴 개화당의 모습은 기존의 통념과 크게 다르다. 이들은 외세를 끌어들여 정권을 장악하고 신분제 개혁 등 조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 했다. '문호 개방' '독립' '개화' 등은 이들이 외국 원조를 기대하며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제시한 구호였다. 이들은 먼저 영국에 접근했고, 영국의 반응이 냉담하자 일본으로 방향을 돌렸다. 일본에 밀파된 이동인은 영국과 일본 사이를 오가며 고난도의 외교 공작을 벌이다 조선의 집권 세력에 살해됐다.

    저자의 서울대 외교학과 박사 논문을 정리한 이 책은 그동안 개화당 인사들의 기록과 회고에 주로 의존했던 개화당 연구의 지평을 넓혀준다. 하지만 외국 사료도 마찬가지로 주관과 왜곡이 들어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김 연구위원은 "외교 문서는 사실을 기록할 수밖에 없고, 여러 나라 외교 문서가 개화당에 대해 같은 이야기를 하면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저자는 박지원의 북학사상이 손자 박규수를 거쳐 개화당에 전승됐다는 통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개화당 비조(鼻祖)'인 오경석은 양반 서얼로 신분제를 비판했던 박제가의 학문을 이어받았고, 외세를 등에 업으려고 한 점에서 박규수와 큰 입장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온건 개화파(김홍집·김윤식·어윤중)와 급진 개화파(김옥균·박영효·홍영식)는 박규수 문하에서 함께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급진개화파는 오경석의 영향을 받았으며 박규수와는 상관없다고 했다. 온건 개화파는 기존 권력 구조와 친청(親淸) 노선을 유지하려 했고, 급진개화파는 권력 구조의 변혁과 친일(親日) 노선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간격이 크다는 것이다. 김 연구위원은 "개화사상이 실학을 계승했다는 담론은 '내재적 근대화'를 밝혀야 한다는 강박에서 출발한 허구"라고 주장했다.

    개화당에 대한 저자의 시선은 비판과 동정이 엇갈린다. 외세와의 결탁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도 국가의 개혁과 생존을 향한 처절한 열망에는 이해를 나타낸다. 김종학 연구위원은 "되도록 감정을 안 실으려고 했는데도 그렇게 됐다"며 "무너져가는 나라에서 내부의 개혁을 위해 외부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던 개화당의 처지가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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