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선물로 책을 줘?… 거, 나쁜 친구네"

    입력 : 2017.07.13 15:47

    [나의 사적인 서가] 소설가 이기호

    내 인생 첫 책 선물, 이청준 '황홀한 실종'… 선생의 농담 안 잊혀
    책으로 드리블 배워 실전 축구서 응용… "매번 볼 빼앗겨"
    이광수 전집 초판본, 헌책방서 사기당한적도

    대외 공개용 말고, 조금 더 내밀한 책 고백은 어떨까. '나의 사적인 서가' 이번 회 주인공은 소설가 이기호(45·광주대 문창과 교수)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와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로 짧디짧은 장편(掌篇) 소설, 소위 '손바닥 소설'과 대중의 만남을 크게 확장하고 있는 작가. '폼나지 않는 인생들에게 바치는 가차 없는 파이팅'이라는 수식어가 절묘하게 어울리는 이 유쾌한 작가에게 물었다.

    1. 요즘 당신의 침대 머리맡에 있는 책은

    "일곱 살짜리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아빠에겐 눈물겨운 질문이다. 아빠 침대 머리맡에 무슨 책이 있냐고? 온통 다 딸아이 책뿐이다. 어제는 '한밤중의 고양이 손님(시공주니어)'을 읽었다. 올해만 벌써 아홉 번째 읽는 책. 고양이 '마사'의 성대모사를 얼마나 일관된 톤으로 하는가가 좋은 아빠의 관건. 성대모사가 달라지면 딸아이에겐 그저 매번 다른 책일 뿐."

    2. 최근 읽은 책 중에 당신을 웃게 만든 책

    "출판사 작가정신에서 근 20년 만에 '소설향' 시리즈를 특별판 형식으로 재출간했다. 그중 정영문의 '하품'을 KTX에서 키들거리며 읽다가 옆에 앉은 군인의 단잠을 방해하고 말았다. 동물원에서 오랜만에 만난 어수룩한 두 남자의 대화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예전에 읽을 땐 몰랐는데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보니, 말놀이 그 자체다. 그래서 깨달은 소설의 비밀 하나. '말'에 예민하게 신경 쓴 소설만이 세월을 뛰어넘어 사랑받는다. 유머도 마찬가지다."


    일러스트=안병현
    일러스트=안병현
    3. 최근에 읽은 책 중 당신을 울게 만든 책

    "책을 읽다가 우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작년 이맘때 반비출판사에서 나온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뒤늦게 읽다가 매 순간 울컥했다. 1999년 4월 20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인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 수 클리볼드가 쓴 이 책은, 아들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끝내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남은 것은 자살로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뿐. 엄마는 사고가 난 당일, 아들의 마지막 말을 반복해서 기억한다. '안녕' 그 한마디만 남기고 가버린 아들. '안녕'이라는 말 때문에 내가 울 줄은 몰랐다."

    4. 당신이 받은 책 선물 중에 가장 잊을 수 없는 책은

    "1991년 생일, 대학 동기이자 시인인 강정이 이청준 선생의 '황홀한 실종(나남)'을 선물로 주었다. 둘 다 가난한 자취생 신분이라 생일 선물 따위를 주고받고 할 형편이 아니었는데, 남의 책에 자기 서명까지 해 건네주었다. 강정은 몰랐겠지만, 그 책이 내 인생 첫 책 선물. 후에 2006년도이던가, 이청준 선생께 지금은 사라진 한국일보사 계단에서 버릇없이 맞담배를 피우면서 그 얘기를 해드렸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무슨 생일 선물로 책을 줘요? 거, 나쁜 친구네."

    5. 죄책감을 느끼지만 좋아하는, 당신의 길티 플레저는

    "'누구보다 축구 전문가가 되고 싶다'(시미즈 히데토·브레인스토어 刊). 2년 전쯤 학과 축구 시합을 앞두고 산 책. '축구를 책으로 배웠어요'의 대표적 폭망 사례. 책에서 배운 대로 호날두의 드리블 기술(그는 항상 볼을 오른쪽 새끼발가락 앞에 둔다)을 실전에서 활용했는데, 그때마다 볼을 빼앗기고 그 자리에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결과는 12대 0. 축구에선 졌지만 지금도 EPL 리그가 열리면 중계방송과 함께 열어보는 책이다. 작가 대신 축구 감독을 꿈꾸게 만드는, 아주 나쁜 책."

    6. 당신 책장에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깜짝 놀랄 책은

    "전업 작가 생활을 하던 시절, 가끔 청계천 헌책방에 나가 책 구경을 하곤 했는데, 그때 한 사장님 말에 홀라당 넘어가 삼중당에서 나온 1962년 4월 판 '이광수 전집' 총 20권을 30만원에 구입한 적이 있다. 이게 1쇄라서 소장 가치가 있거든. 이따 누가 사 간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져 근처 은행 ATM기에서 현금을 찾아 고스란히 내 방 책장으로 모셔왔다. 읽지는 않고 매일 쳐다보며 흠 이러다가 나중에 '진품명품'에 나갈지도 모르겠군, 생각만 했던 전집. 올해 '무정' 100주년을 맞아 무슨 학회에 발표할 자료를 찾다가 구입 후 처음으로 그 전집을 찬찬히 살펴봤는데, 허걱, 이게 웬일. 전집 18권과 19권은 1쇄가 아닌 2쇄본이었다. 이러면 '진품명품'에 나가도 아무 소용이 없는데…. 한국 문학은 이제 겨우 100년이 지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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