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간이식당… 고독과 불안 품은 도시의 속살을 엿보다

    입력 : 2017.09.07 15:34

    스티븐 킹, 캐럴 오츠…
    호퍼 그림에 영감 얻은
    17인 17색 단편소설집

    빛 혹은 그림자

    로런스 블록 엮음 | 이진 옮김 | 문학동네 440쪽 | 1만8000원

    어두운 밤, 간이식당에 네 사람이 있다. 대형 수족관처럼 내부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식당이다. 주인 혼자 일하고 있는 가운데 손님이라곤 남녀 한 쌍과 홀로 온 남자뿐이다. 어두운 거리에서 실내 조명에 밝게 물든 식당 내부만 훤하게 드러나 있다. 도시의 고독과 우수가 절로 느껴진다.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 1967)의 회화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보여준 현대사회의 사실적이면서 몽환적인 풍경이다.

    이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낯설지가 않다. 지금껏 숱한 영화 혹은 광고가 그 그림의 색조와 구도, 명암을 차용해왔기 때문이다. 호퍼의 회화는 화려하고 투명한 도시 문명의 겉면에 숨어있는 우울과 불안이 밤이 되면 희미한 조명을 받아 음울하게 드러나는 순간을 포착해왔다. 어떤 이야기가 진행 중인 듯한 느낌을 준다. 알게 모르게 수많은 소설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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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호퍼 ‘자동판매기 식당’(1927). /ⓒ Des Moines Art Center·문학동네
    미국 문학의 수퍼스타로 꼽히는 스티븐 킹을 비롯해 미국 소설가 17명이 호퍼의 작품을 소재로 쓴 단편 소설 모음집 '빛 혹은 그림자'가 우리말로 번역됐다. 올해 에드거상 수상 작가 로런스 블록이 동료 작가들에게 청탁해 엮어낸 책이다. 블록이 호퍼의 회화에서 실마리를 얻어서 쓴 에드거상 수상작 '자동판매기 식당'도 들어있다.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조이스 캐럴 오츠 외에도 추리 소설 혹은 범죄 소설로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마이클 코널리, 제프리 디버 등도 이 특이한 소설책에 동참했다.

    범죄 소설과 공포 소설은 물론이고 문예 소설까지 다양하게 들어있다. 문학과 미술의 만남이 빚어내는 현상을 제시할 뿐 아니라 소설의 서사 형식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책이다. 호퍼의 미술 세계가 대공황이 일어난 1930년대를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단편들도 대부분 그 시대의 심리적 공황 상태가 반영된 풍속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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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새우는 사람들’. 현대인의 고독과 우울을 담아낸 그의 그림에서 문학계와 영화계는 영감을 얻었다. 스티븐 킹, 조이스 캐럴 오츠, 마이클 코널리 등 작가 17명이 호퍼의 그림 17점을 소재로 쓴 단편소설을 책으로 묶었다./ⓒThe Art Institute of Chicago·문학동네
    마이클 코널리는 호퍼의 대표작 '밤을 새우는 사람들'을 이용해 한 편의 탐정 소설을 써냈다. 탐정이 한 여자를 감시하는 일을 의뢰받은 이야기다. 여자는 날마다 미술관에서 가서 호퍼의 그림 '밤을 새우는 사람들'을 감상하며 소설을 노트에 끄적거린다. 그림을 보는 시선과 그 앞에 선 여자를 보는 탐정의 시선, 그 모든 것을 보는 독자의 시선이 격자 구조를 이룬다. 여자는 탐정에게 말한다. "이야기는 항상 있어요. 그림이란 결국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잖아요. 저 그림 제목이 왜 '밤을 새우는 사람들(Nighthawks)'인지 아세요?"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여자는 탐정에게 설명한다. 한 남자의 코는 날카롭고 새의 부리처럼 구부러져 있다. 쑥독새(Night hawk)를 닮았다는 것. 그 남자의 곁엔 붉은색의 옷을 입은 여자가 앉아있다. 식당 주인은 손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뭔가 작업 중이다. 그리고 홀로 떨어져 앉아 등을 관객 쪽으로 보인 채 웅크리고 있는 사내가 보인다. 그 외톨이는 저마다의 사연으로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분리된 채 살아가는 고독한 개인을 상징한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소설 '창가의 여자'는 호퍼의 기괴한 그림 '오전 열한 시'에서 뽑아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그림은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벌거벗은 여자가 안락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장면을 그렸는데, 묘하게도 여자는 하이힐을 신고 있다. 이 소설은 그 여자가 평소엔 비서로 일하지만, 직장 상사의 숨겨 놓은 정부(情婦)라고 설정했다. 그녀가 남자의 변태적 주문에 따라 밀회를 앞두고 벌거벗곤 하이힐만 신은 채 남자를 기다린다는 것.

    이 소설은 그 여자가 남자를 기다리면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와 회한에 이어 참을 수 없는 살의(殺意)까지 세밀하게 묘사한다. 마침내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소설은 끝나지만, 독자의 상상력은 그때부터 힘차게 움직인다. 폭탄의 심지 끝까지 타들어가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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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호퍼 ‘뉴욕의 방’(1932). /ⓒ Sheldon Museum of Art·문학동네
    스티븐 킹은 호퍼의 그림 '뉴욕의 방'을 소재로 단편 '음악의 방'을 썼다. 뉴욕의 아파트 창문을 통해 들여다본 방의 풍경이다. 남자는 신문을 읽고 있고 여자는 피아노 앞에 앉아있다.

    밤이 깊은 가운데 실내 조명은 훤하지만 부부의 얼굴은 그늘로 얼룩져 있어 파악하기 힘들다. 평범한 거실 풍경인데, 남편은 넥타이를 맨 채 신문을 열독 중이고, 아내는 곧 외출이라도 할 듯한 복장에 피아노 건반에 한 손가락을 얹어 놓고 있다. 시대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기.

    남녀는 자신들의 집에 있지만, "적어도 그들에겐 일이 있었고, 여전히 사람들이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것은 축복이었다"라고 한다. 그들의 '일'은 무엇일까.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고 나서 호퍼의 그림을 다시 보면 숨막히는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 된다.

    호퍼의 그림을 평소 좋아한 작가들이 펼친 소설의 향연이다. 하지만 수준이 다 고르진 않다. 책의 맨 앞에 실린 단편 '누드 쇼'는 지루하기만 하다. '뉴욕 저널 오브 북스' 서평도 "편집자가 판을 벌이면서 첫 작품으로 선뜻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맨 끝에 실린 로런스 블록의 단편 '자동판매기 식당'부터 읽는 게 좋다. 고전적 단편 소설 특유의 반전(反轉)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예술가들의 ‘뮤즈’ 에드워드 호퍼

    에드워드 호퍼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미국 사회의 전형적인 장면을 포착한 화가다. 아메리칸 드림에 드리워진 어둠과 그늘을 또 다른 꿈의 풍경처럼 보여주면서 미국인의 고독과 우울을 형상화했다는 평을 받는다. 호퍼는 희미한 실내 조명 속에 드러난 사무실이나 호텔, 식당을 묘사하면서 대도시의 짙은 우수(憂愁)를 재현했다. 히치콕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감독이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그 이미지를 스크린에 투사하거나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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