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륙 식민지 경영… 英은 성공하고 스페인은 실패했다?

  • 우석균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교수

    입력 : 2017.09.14 14:58

    역사학자 엘리엇 교수 근대 남북 아메리카 비교
    미국은 성공, 남미는 실패? 이분법 프레임 벗어나
    스페인령 아메리카 영국서 부러워하기도

    책 표지 이미지
    대서양의 두 제국

    존 H. 엘리엇 지음|김원중 옮김|그린비|1064쪽|4만9000원

    '스페인 제국사 1469-1716'와 '히스패닉 세계'의 저자인 존 H 엘리엇(87)의 또 다른 역작 '대서양의 두 제국: 영국령 아메리카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1492~1830'이 번역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독립했는데 왜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오늘은 이토록 다른가 하는 질문을 많이 받아온 터라 대단히 반갑다. 너무나 긴 설명을 요하는 질문인 것도 문제고, 이미 두 지역을 각각 성공과 실패의 사례로 확고하게 규정하고 던지는 질문인지라 답을 하는 것 자체가 곤혹스러웠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타자 이해 수준만 탓할 일은 아니다. 막스 베버 같은 석학도 매일반이다. 그의 대표작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산업화에서 북유럽의 성공과 남유럽의 실패를 기정사실로 못박고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들을 '꿰맞춘' 책일 뿐이다. 이 시각이 영국이 지배한 미국과 스페인이 지배한 라틴아메리카의 성공과 실패라는 결정론적 시각으로 변환되고 고착화되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가령, 칠레 역사학자 클라우디오 벨리스의 '고딕 여우의 신세계'(1994)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물론 라틴아메리카의 '실패'를 서구의 착취 내지 사다리 걷어차기 탓으로 여기는 종속이론 유의 거센 반격도 있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수탈된 대지'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적 프레임에 갇힌 면이 없지 않았다.

    저자 엘리엇은 영 케임브리지대와 미 프린스턴대의 서양 근대사 교수를 지낸 원로 역사학자. 그에 따르면 이 이분법의 기원은 뿌리가 더 깊다. 가령, 1770년대 초에 프랑스계 미국인 크레브쾨르는 지배 국가의 차이가 영국령 아메리카와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운명을 갈랐다는 주장을 펼쳤다. 비서구 지역에 후진성, 미신, 나태의 원죄를 뒤집어씌운 계몽주의와 같은 시각이다. 나아가 16세기 북유럽 국가들이 종교전쟁의 와중에서 스페인 비난용으로 정립한 소위 '흑색전설'(에스파냐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 주민의 고통과 희생)의 재생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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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3년 보스턴 판화업체 루이스 프랑&컴퍼니가 제작한 그림. 막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가 왼손에 깃발을 오른손에 검을 든 채 신대륙을 ‘접수’하고 있다. 스페인 왕실의 후원으로 탐험에 나선 콜럼버스가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함에 따라 아메리카는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가 된다. / Wikimedia Commons

    엘리엇은 이런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양 지역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편견 없이 점검할 것을 주장한다. 식민 본국의 제도와 문화, 식민지의 생존 조건, 식민 본국과 식민지의 관계, 식민 본국 간의 상호 학습 혹은 갈등, 시대에 따른 변화 등이 그가 고려한 요인들이다. 그 결과 독자 입장에서는 뜻밖의 역사적 사실들과 만나게 된다. 스페인보다 1세기 후에 식민 체제 정비에 나선 영국인들이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정교한 관료 체제를 부러워했다거나 비용 대비 수익 분석 결과 영국의 미국 지배는 사실상 실패라는 애덤 스미스의 고백 등이다. 엘리엇에 따르면 영국인이 본질적으로 뛰어나고 스페인인이 무능해서 오늘의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차이가 발생한 것이 결코 아니다.

    엘리엇은 두 지역의 운명을 역사의 새옹지마로 설명한다. 가령, 라틴아메리카의 막대한 은과 풍부한 선주민 노동력이 주는 매력 때문에 스페인인들은 초기부터 통치 체제 구축에 열을 올렸고, 그 덕분에 식민 본국과 식민지 모두 영국과 영국령 아메리카보다 한발 앞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손쉬운 이윤 창출, 헐값 노동력, 창의성의 걸림돌이 된 관료주의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경쟁력을 상실했다. 반면 초기의 미국은 은과 같은 경제적 유인 요건이 별로 없어 영국은 식민지 경영에 무관심했고, 이에 따라 식민지 개척은 난개발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식민 정주자들은 복속되지 않은 인디언들 때문에 지속적으로 생존 위협을 느꼈다. 엘리엇은 식민 정주자들의 이 각자도생의 상황이 장기적으로 독립성, 진취성, 자아실현 의지, 혁신이라는 미국인들의 미덕을 낳았다고 본다.

    스페인 전공자인 엘리엇이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비교 연구로 영역을 넓혔다는 점 자체가 참신한 일이다. 세계화 시대의 과제인 타자의 역사적 경험을 포용하는 세계사 서술을 늦은 나이에도 회피하지 않았던 학문적 열정에도 머리가 수그러진다. 우승열패의 단순한 역사관 대신 교환, 복합 글로컬(glocal) 네트워크, 상호 문화성에 입각한 새로운 역사관을 제시하자니 그 결과물도 방대하다. 그래서 이런 책을 매끄럽고 끈기 있게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도 박수를 보내게 된다. 덕분에 우리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정신이나 진취성과 자아실현을 골자로 한 미국인들의 자화자찬인 프런티어론을 탈신화시키는 좋은 책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원제 'Empires of the Atlantic World: Britain and Spain in America 1492-1830'.

    우석균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교수
    우석균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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