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惡에 짓밟힌 인간 群像 그려…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건 反문화적"

    입력 : 2017.10.12 03:02

    영화 '남한산성' 원작자 김훈, 황동혁 감독 인터뷰

    '나는 세계 악(惡)에 짓밟히는 내 약소한 조국의 운명 앞에 무참하였다.'

    2007년 소설 '남한산성' 머리말에 작가 김훈(69)은 이렇게 썼다. 10년 만에 스크린으로 옮긴 동명(同名) 영화(감독 황동혁)는 북핵 위기와 중국의 '사드 보복' 속에서 정치권의 쟁점이 되고 있다. 작가와 감독은 이 공방을 어떻게 생각할까. 10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김훈과 황동혁(46)을 만난 자리에서도 380년 전의 병자호란과 오늘날의 함수 관계부터 물었다.

    ―소설을 쓸 때나 지난해 영화 촬영 때 이런 현실이 반영됐나.

    김훈(이하 '김'): "당대의 외교나 정치는 거의 인식하지 않았다. 이 세상의 기본적인 악(惡)과 폭력, 야만성에 짓밟히거나 저항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꼬락서니를 그리고자 했을 뿐이다. 강대국 틈새에 끼여 시달리는 기본 구도는 병자호란과 오늘의 현실이 흡사하다. 하지만 동족 갈등이 겹쳐 있고 러시아·일본까지 개입한 지금이 100배는 복잡하고 어렵다."

    황동혁(이하 '황'): "2015년 7월 시나리오를 쓸 때는 북핵이나 사드를 예상할 수 없었다. 다만 소설을 읽으면서 과거와 현재 상황에 비슷한 점이 적지 않아 답답하다고 느꼈을 뿐이다."

    소설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왼쪽)과 영화감독 황동혁은 둘 다 문학과 영화 데뷔가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다. 김씨는 “쉰을 넘어서야 ‘칼의 노래’를 썼다. 나는 목표나 등대가 없다”고 했다. 황 감독은 “대학 졸업 무렵 하기 싫은 일을 지워가다 보니 마지막에 영화가 남았다”고 했다.
    소설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왼쪽)과 영화감독 황동혁은 둘 다 문학과 영화 데뷔가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다. 김씨는 “쉰을 넘어서야 ‘칼의 노래’를 썼다. 나는 목표나 등대가 없다”고 했다. 황 감독은 “대학 졸업 무렵 하기 싫은 일을 지워가다 보니 마지막에 영화가 남았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영화 개봉 이후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공방에 대한 느낌은.

    김: "영화는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속 보이는 소리들을 하고 있다. 일정한 틀(frame) 속에 대중을 가두는 것도 반(反)문화적이다."

    황: "촛불 집회와 대통령 탄핵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영화 개봉 시점인 올가을은 대선 정국이었을 것이다. 대선 후보들 간의 공방으로 시끄러운 정국이 될 수도 있겠다고는 생각했다. 정세에 맞춰서 해석한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것 역시 정치의 일부일 것이다."

    ―'살아서 치욕을 견뎌야 한다'는 주화파(主和派)와 '죽음을 각오하더라도 의로움을 지켜야 한다'는 척화파(斥和派) 가운데 어느 쪽 손을 들어주고 싶나.

    김: "인조의 투항은 자기 자신과 조선을 전환시키고자 하는 행위였다. 인조의 투항에서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론(北伐論), 다시 '청을 배우자'는 북학파(北學派)로 조선은 180도 전환하면서 생존을 도모했다. 과연 지금은 그런 전환이 가능할까."

    황: "지금은 주화나 척화, 화친이나 배척 같은 단순한 양자택일의 구도가 아니다. 미·중(美·中)과 러·일, 북한까지 훨씬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역학관계 속에 있다."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삼전도의 굴욕' 장면에서 인조의 이마에 흙이 묻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황: "정사(正史)에 인조의 이마에 피가 흥건했다는 기록은 없다. 조선 국왕이 겪어야 했던 치욕을 강조하다 보니 생겨난 이야기일 것이다."

    김: "소설에서도 인조가 땅바닥에 엎드리는 순간 멀리서 올라오는 초봄의 흙 냄새를 맡는다. 아마 인조는 태어나 처음으로 흙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절망 속에서 다가오는 작은 희망의 싹을 느끼는 것이다."

    ―영화는 소설 속 대사를 크게 손보지 않고 살리는 쪽을 택했다.

    황: "소설에서 말이 지닌 힘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요즘 사극처럼 쉽게 풀어쓸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굳이 김훈의 원작을 택할 이유가 없었다."

    김: "한자어와 문어체, 사대부의 어법이 영화에서도 표현 가능할지 내심 의문이 많았다. 하지만 문자의 차원에 있던 말이 관념의 탈을 벗어나 육신을 얻어가는 것 같았다. 김상헌과 최명길의 말은 서로 부딪쳐서 가루가 되고 부서진다. 말의 장엄한 비극성이 화면으로 전달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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