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는다고 옷 몇번씩 갈아입어… 천경자 선생은 소녀 같았죠"

    입력 : 2017.11.08 03:02

    '사진으로 만난 인연' 이은주 작가

    40년간 문화예술가 500여명 찍어
    "'제왕' 파바로티 사진 촬영 땐 그의 배 가리려 스태프들 몰려와"

    사진 인생 40년을 맞은 이은주 작가.
    사진 인생 40년을 맞은 이은주 작가. /이태경 기자
    사진작가 이은주(72)가 화가 천경자를 만난 건 1992년이다. 서울 압구정동 자택에서 만난 천경자는 사진작가가 온다고 미용실에도 다녀오고 옷도 몇 번씩 갈아입었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는 화가에게서 이은주는 외로움을 보았다고 했다. "까다로우실 줄 알았는데 순수하고 꾸밈없는 소녀였죠. 사진계의 천경자가 되고 싶다 하니 '신념을 가지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날 촬영한 천경자 사진은 서울시립미술관에 소장됐다.

    이은주 사진집 '사진으로 만난 인연'(안나푸르나)은 문화예술계 인물들과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이은주의 사진 인생 40년을 되돌아본 기록이다. 백남준·천경자·김창열 같은 화가들을 비롯해 김수환·법정·마더 테레사 같은 종교인, 무용가 강선영·김백봉·강수진, 음악인 정명훈·강동석, 연극인 박정자·윤석화 등 당대 스타들을 망라한다. "그 사이 돌아가신 분도 서른일곱 분이나 되네요. 풋풋했던 청년 시절, 스타가 돼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병들어 스러지는 모습까지 지켜본 거인(巨人)들이죠."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무소유'로 이름난 '글쟁이' 법정 스님은 잊을 수 없다. "별세 소식 듣고 비행기로 날아갔는데 검버섯 많던 얼굴에 분을 발라 참 곱데요. 부인 시게코 여사가 멀리서 왔으니 남편 손을 만져보라고 해요. 차가웠죠. 생전에 당신은 '병 들어 작업 못 하면 네덜란드 가서 안락사할 거다' 큰소리치셨는데 막상 쓰러지셨을 땐 너무너무 살고 싶어했던 기억이 떠올라 슬펐어요."

    법정 스님과는 88서울올림픽 때 열린 국제학술회의에서 처음 만났다. "'무소유'로 스타가 되셨을 때였죠. 송광사 불일암에서 다시 뵈었을 때 그 많은 팬레터는 다 읽어보시느냐 여쭸더니 '읽지 않고 모두 화로에 불태운다' 하시데요. 답장을 하면 오고가는 인연이 복잡해진다며. 길상사에 조문객들 미어터지는데, 법정 스님이나 백남준 선생 모두 자식은 없어도 참으로 성대하게 가시는구나, 인생이란 잘 떠나는 게 중요하구나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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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 사진을 개척한 이은주가 40년 동안 카메라에 담은 문화 예술인들의 젊은 시절. 왼쪽부터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자택에서 만난 화가 천경자, 열정 어린 청년 지휘자 정명훈, 리허설 하다 잠깐 쉬고 있는 발레리나 강수진, 연극배우 이호재.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무용 공연을 즐겨 보다 무대 사진으로 입문했다. 영국 작가 데이비드 해밀턴의 발레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르누아르의 그림 같았죠. 남자들 우글거리는 세계에 겁도 없이 뛰어들었지만 '무대 사진은 이은주다' 인정받으려고 이를 악물고 뛰었어요." 1981년 국립무용단 공연 '허생전'을 찍은 '환희'로 제30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사진부문 대상을 받으면서 이름을 알렸다. 키로프·볼쇼이 같은 해외 유명 발레단은 물론 세계 3대 테너 공연도 도맡았다. 파바로티를 많이 찍었다는 이은주는 그를 '제왕'이라 불렀다. "요리사, 운전기사까지 모두 데리고 들어와 내한 공연을 했죠. 사진을 찍으러 갔더니 갑자기 스태프들이 파바로티 앞으로 몰려가 무릎을 꿇고 앉아요. '제왕'의 불룩한 배를 가리기 위해서였죠(웃음)." '사진으로 만난 인연'은 40년간 카메라로 담은 문화예술가 500여 명 중 주요 사진들만 추려 실었다. 춤이 끝난 뒤 눈가에 화장이 번진 채 숨을 몰아쉬는 발레리나 강수진, 입을 앙다물고 지휘하는 청년 정명훈, 배우 손숙의 70년대 앳된 미소가 신선한 감동을 안긴다. 이은주는 "사진가는 반(半)심리학자가 돼야 한다"며 웃었다. "그 사람을 읽지 못하면 찍을 수 없으니까요.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집요하게 찾아갔어요. 정치인 찍지 않고 예술가들만 찍은 건 얼마나 잘한 일인지. 내 인생의 폭을 넓혀주었을 뿐 아니라 날 젊게 살게 하는 활력소가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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