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人도 秀才도 마지막엔 일렬횡대… 당신은 '끝난 사람'이 아닙니다

    입력 : 2017.12.28 16:02

    [어수웅의 Dear 라이터] 작가 우치다테 마키코

    끝난 사람

    우치다테 마키코 지음 | 박승애 옮김 | 한스미디어|445쪽 | 1만5000원


    일본 작가 우치다테 마키코(69·사진)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그의 소설 때문이었다. 제목부터 압도당했다. '끝난 사람'. 65세로 정년퇴직한 남자 주인공을 네 살 위 여성 작가는 그렇게 호명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정년퇴직이라…이건 뭐 생전 장례식이다."

    생전 장례식을 치르는 끝난 남자라. 이 비감하고 섬뜩한 고백을 이끌어낸 작가의 내면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 있을까. '75세 현역'이라는 노익장(老益壯)의 구호와 '품격있는 쇠퇴'가 필요하다는 겸손이 양립하는 이 시대에 주는 함의는 뭘까.

    인터뷰를 준비하다가 이 여성 작가가 일본 드라마 작가의 최고봉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NHK 방영 당시 최고 시청률 42.9%를 기록했다는 사극 '히라리'(1993) 등 그동안 쓴 드라마만 50여 편. 직접 쓴 소설도 장·단편 44편에 산문 76편이라고 했다. 도쿄 아카사카에 있는 개인 작업실을 찾았다. 명망 있는 작가답게, 전속 출판사 격인 고단샤(講談社)의 해외 저작권 담당자와 담당 편집자 등 두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우선 압도됐던 책 제목부터.

    ―비감하지만, 동시에 섬뜩하다. 어떻게 탄생한 제목인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큰 회사를 10년 넘게 다녔다. 미쓰비시중공업. 사람들이 일류 대기업이라 부르던 직장이다. 매년 정년퇴직하는 사람만 50~60명씩 있었다. 내가 마흔 무렵, 퇴직하는 그분들에게 물었다.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 거냐고. 이러더라. 아내랑 온천을 가거나, 손자랑 놀거나, 정원을 손질하거나…. 그때는 그렇구나, 좋겠다 생각했는데, 내가 그 나이가 되고 보니 다 허세고 거짓말이었다."

    ―허세와 거짓말?

    "예순이 넘고 나니, 갑자기 동창회가 잦아졌다. 그런데 신기했다. 은퇴한 친구들을 보니 다 똑같이 일렬횡대더라. 엘리트도 미인도, 대학 못 간 친구도 못생긴 동창도 마찬가지. 퇴직 후에 뭐 하냐 물었더니, 할 일이 별로 없다고 다들 푸념하더라고. 그때 '끝난 사람'이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끝난 사람'의 주인공 다시로 소스케는 엘리트였다. 도쿄대 법대를 졸업하고, 일류 은행에 입사한다. 하지만 임원 경쟁에서 탈락하고 자회사에서 전무로 정년퇴직. 엘리트의 자부심으로 처음에는 다른 은퇴자들의 평범한 일상을 경멸한다. 자원봉사나 문화센터 취미 강좌, 헬스클럽 등을 철저히 거부하는 것. 하지만 곧 뼛속까지 깨닫는다. 시간이 남아돌아 주체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사실을. 이 와중에 한 벤처기업 고문으로 참여했다가 회사 빚을 떠안고, 가슴을 설레게 한 노년의 연애마저 실패한다. 중요한 건 이 추락의 와중에서 누구 하나 악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기도 아니었고, 꽃뱀에 당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책임지고, 고향 시골 마을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요미우리신문 편집위원인 하시모토 고로는 "60대인 나 자신이 벌거벗겨진 기분이 들 정도로 무섭고 리얼하다"고 독후감을 썼다.

    /박상훈 기자
    ―품격 있는 쇠퇴가 중요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반면 어떤 이들은 75세 현역시대라고도 한다. 언제부터 노년이며, 노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일본은 고령자를 둘로 나눈다. 전기 고령자와 후기 고령자. 각각 65, 75세다. 나는 65세부터는 고령자라 생각한다. 유감이지만, 고령자가 젊은 사람이랑 싸우면 백전백패다. 35세의 기억력과 체력을 어떻게 이기나. 75세 현역은 자신만의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닐까. 작가, 영화감독, 혹은 칠기(漆器)의 장인이거나. 세대교체는 당연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한국은 잘 모르지만, 일본은 노인들이 살기 좋은 나라라고 본다. 반면 젊은이들은 고생이 늘고 있다. 인원도 갈수록 줄고, 그러니 부모 세대에 대한 부양 부담은 늘고. 노인들이 더 솔선수범하고, 감사의 마음을 더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배 세대로 화제를 돌려 보자. 지금의 20~30대는 '정년퇴직'이라는 단어를 고어(古語)나 사어(死語)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평생직장을 기대하기 힘든 세상이니까.

    "노인들의 솔선수범을 먼저 말했으니, 젊은 세대에게도 충언하고 싶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겠다며 쉽게 직장을 그만두는 친구들이 있다. 물론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남들은 참을 줄 몰라서 그만둘까. 자신이 중요하다? 물론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아버지의 책임감, 남편이라는 책임감도 희박해지는 것 같다. 아마 '자기 퍼스트'인 사람들은 인생이 한 번뿐이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정직해지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 말하지만, 재능까지 받쳐주는 이들은 얼마나 되나. 대기업 직원과 무명 시인이 있다고 치자. 나는 자식이 없지만, 내가 딸이 있다면 시인에게는 딸을 주지 않을 거다."

    '끝난 사람'의 주인공 소스케가 정년퇴직한 날, 그의 장모는 사위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위, 가족 부양이라는 무거운 짐을 끝까지 잘 감당해줘서 고마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족을 울리는 일도 없었고, 길에 나앉게 하지도 않았고, 끝까지 책임을 졌다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큰 거야. 정말 고마워. 나는 외동딸을 우리 사위에게 시집보낸 것이 제일 큰 자랑이야."

    기성세대의 가부장적 세계관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자기 퍼스트' 세대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기도 하다. 이 보수적 작가는 특히 남성들의 책임감을 강조했다. "아내와 아이는 남편 책임 안에 있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젊은 남자들이 '자기 퍼스트'라는 말에 숨어서, 책임을 미루면 안 된다."

    주체적 여성의 입장에서는 분노할지 모르는 주장이지만, 이 작가의 행보에는 일관성이 있다. 흥미로운 이력 하나 더. 우치다테 마키코는 일본 스모 사상 최초의 여성 요코즈나 심의위원. 최고의 경지인 요코즈나 승급 자격을 심사하는 역할이었다. 전문가의 안목과 경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자격. 사연을 묻자, 그는 소녀처럼 웃으며 6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어린이집을 다니던 네 살 무렵, 친구들에게 심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다. 그때마다 동갑내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덩치 큰 남자 아이가 구해줬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덩치로 승부하는 격투기의 세계가 좋았고, 짬날 때마다 라디오 중계방송을 들었다고 했다. 55세에는 대학원까지 입학해 스모의 역사와 이론적 배경을 공부했다. 일본의 전통 격투기 스모는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낯설고 먼 종목. 이 일화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나라의 개별 격투기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이 작가가 옳다고 믿고 지키려는 전통의 가치일 것이다.

    ―노인들의 경험과 지혜가 점점 힘을 잃는 세상이다. 오히려 지금은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인터넷과 스마트폰 사용법을 가르친다. 이런 세상에서 전통은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가.

    "전통은 매우 중요하다. 한 번 끊어지면 그 전통은 거기서 끝이다. 그다음부터는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물론 바꿔야 할 것은 바꿔야겠지만, 지켜야 할 것은, 무슨 수를 쓰든 지켜야 한다. 그 판단을 잘못하면 이상해진다. 쉰 넘어 대학원에 간 것도 사연이 있다. 2000년대 초반, 일본에는 페미니즘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당시 그들은 왜 여성 스모 선수가 없느냐고 비판했다. 여성도 씨름판에 올라가 우승컵을 들겠다고 목청을 높였다. 최초이자 유일했던 여성 요코즈나 심의위원이었던 내가 이런 이야기하는 게 아이러니지만, 앞장서 반대했다. 스모는 오랜 역사를 지닌 일본의 전통문화다. 남성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이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라며, 지금의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옳지 않다. 일본에는 여성만 출연하는 전통 여성극(劇)도 있다. 남녀평등이라고 여기에 남자가 출연하겠다고 하면 말이 되나."

    이미지 크게보기
    /히로히사 후지마키
    ―전 세계적으로 페미니즘 열풍이다. 남녀는 어떤 역할을, 그리고 어떻게 균형을 이뤄야 할까.

    "나는 남녀평등을 찬성한다. 단, 남자든 여자든 능력 있고 잘하는 사람이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본다. 처음부터 비율을 정해놓는 건 반대다. 집안일도 마찬가지. 남편이 집에서 설거지하고 아이를 돌보고 있는데, 아내가 밖에서 친구들과 런치를 즐기는 건 안 되겠지(웃음)."

    명문 무사시노 미술대학을 졸업한 이래, 우츠다테 마키코는 입체적인 인생 이력을 작성해왔다. 미쓰비시중공업에서 13년 6개월을 일했고, 1988년 NHK '장미'로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50여 편의 드라마를 썼다. 소설과 에세이는 물론, 영화 시나리오, 만화 시나리오 등 종횡무진 작가 인생만 30년이다. 그 사이사이 도쿄도 교육위원, 요코즈나 심의위원, 대학원 공부를 한 도호쿠대학 스모부 총감독, 동일본대지진 복구 구상회의 위원 등을 지냈다.

    ―품격 있는 쇠퇴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선생은 70세 현역이기도 하다. 70년 된 지혜, 70년 된 경험을 나눠 주신다면.

    "깨달음을 준다는 거창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나는 결혼한 적도, 아이를 가져본 적도 없다. 남편의 불륜에 마음 아파해 본 적도 없고, 아이가 공부 못한다고 걱정한 적도 없다. 따라서 함부로 말할 처지가 아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 하나는 하고 싶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동창을 보면 경력이 화려할수록 착지가 불안하다. 주목받은 인생일수록 낙차가 크더라. 하지만 대학도 못 가고, 작은 공장에서 성실하게 일했던 친구들이 연착륙을 했다. '끝난 사람'를 펴내고 나서 전국에서 독자 카드를 많이 받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줘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떨어진 벚꽃도, 남아 있는 벚꽃도 다 지는 벚꽃'이라는 일본 격언이 있다. 우리 모두 마지막에는 일렬횡대다."

    제목은 과격하지만, '끝난 사람'은 끝까지 온기를 잃지 않는다. '노후 파산'이니 '장수 악몽'이니 중장년에게 겁을 주는 '공포 마케팅'이 횡행하는 세상이지만, 미리 두려워하며 미리 고생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바닥까지 경험한 소스케는 고향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여든아홉 어머니는 고향에 내려온 늙은 아들을 '한창때'라 부른다. 어쩌면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감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젊은 시절에 수재 소리를 들었든 못 들었든, 미인이든 아니든, 일류 기업을 다녔든 못 다녔든, 종착역에서는 우리 모두 일렬횡대. 당신은 아직 창창하다.

    ◇우치다테 마키코(內館牧子)

    1948년 일본 아키타 출생
    1970년 무사시노 미술대학 디자인학과 졸업 이후 미쓰비시중공업에서 13년 근무
    1988년 드라마 작가 데뷔. NHK ‘히라리’등 현재까지 드라마 50편, 소설 44편 집필
    2000년 일본 스모 최초 여성 요코즈나 심의위원
    2003년 도호쿠대학원 문학연구과 입학(55세)
    2011년 몬테카를로 TV필름 부문 최우수 작품상
    2017년 소설 ‘끝난 사람’ 국내 출간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