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는 자신의 얼굴을 그리지 않았다

    입력 : 2018.02.22 16:14

    뒤러부터 앤디 워홀까지
    자신의 얼굴 그린 자화상
    화가, 수많은 고통 담아
    내면 표현하는 도구로 써

    자화상의 비밀

    로라 커밍 지음ㅣ김진실 옮김ㅣ아트북스ㅣ504쪽ㅣ3만원

    자화상에 대한 오래되고 엄연한 정의는 '그림을 그린 화가 자신의 초상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화상 속 인물을 보며 화가의 실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반에이크, 뒤러, 렘브란트, 쿠르베, 뭉크 등 숱한 화가들의 자화상을 담은 이 책은 그런 일반의 인식에 도전한다. 시스티나성당 벽에 새긴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엔 근육과 뼈를 발라낸 인간의 살가죽이 그려져 있다. 이 축 늘어진 피부 덩어리가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다. 겉모습보다 인간 내면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이 그림은 죄 많은 육신을 벗고 신 앞에 다시 서겠다는 고백이자 얼굴이 아니라 마음을 그린 내면의 자화상이다.

    영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인 저자 로라 커밍은 자화상을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는 특별한 수단'이라고 정의한다. 수많은 자화상과 그것을 남긴 화가들의 삶이 교직된 책을 통해 그는 예술이 아니고서는 드러낼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저자는 먼저 자화상의 시선(視線)을 주목한다. 저자에 따르면 시선은 남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와 자화상을 가르는 가장 특징적인 요소다. 15세기 중반 산드로 보티첼리는 '동방 박사들의 경배'에 자신을 그려넣었다. 그림 속 모든 인물이 한결같이 옆얼굴을 보인 자세로 예수 탄생을 경배할 때 오직 오른쪽 구석의 한 남자(보티첼리)만이 시선을 돌려 예수가 아닌 그림 밖에 있는 감상자와 눈을 맞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이 작품을 그렸다는, 화가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낸 사례다.

    미켈란젤로가 신 앞에서 면죄를 갈구하는 피조물을 그렸다면 독일 알테피나코테크미술관에 소장된 뒤러의 '자화상'(1500년)은 정반대로 예수의 이미지를 따 왔다. 뒤러는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니 인간의 형태야말로 신성의 표현이라는 믿음을 자화상에 구현했다. 책은 화가의 삶과 자화상을 겹쳐 읽는 재미도 선사한다. 스무 살이 되기 전 아버지의 친구에게 성폭행 당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17세기 여성으로선 흔치 않게 강간범을 법정에 세운 당찬 여성이었다. '그림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은 그의 이런 다부진 성격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반듯한 이마와 곧게 뻗은 콧날, 붓을 든 손과 팔뚝에 강조된 강인함은 여성으로 겪은 고난을 딛고 직업으로서 화가의 길을 택한 이의 결의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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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훈 기자
    수많은 화가가 자신이 겪은 고통을 자화상에 담았다. 하지만 고통을 대하는 화가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고통의 꽃'에서 타오르는 지옥의 유황불 속에 자신을 던져넣은 뭉크는 자기 곁을 떠남으로써 실연의 고통을 안긴 옛 연인을 비난한다. 반면 살인죄를 짓고 쫓기던 카라바조는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에서 골리앗의 잘린 머리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는 것으로 스스로를 정죄했다.

    사진의 탄생은 또 다른 자화상의 세계를 열어젖혔다. 그림은 오브제를 조작할 수 있지만 사진은 피사체를 그대로 찍는다. 신디 셔먼은 사진의 이런 속성을 절묘하게 비틀어 가짜 이미지가 넘쳐나는 자화상을 만들었다. 셔먼은 무뚝뚝한 사춘기 소녀부터 처녀의 시체, 맨해튼의 부유한 과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미지를 찍었지만, 사진 속 인물이 모두 셔먼 자신이라는 점에서 '사진은 사실을 찍은 것이 될 수 없다'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냈다.

    저자는 예술이 구현해온 자화상의 의미를 보르헤스 소설 '모든 것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저승에 간 셰익스피어가 신과 나눈 대화에 빗대 설명한다. 너무도 많은 인물을 창조했던 셰익스피어는 신에게 자신이 적어도 한 사람으로서 설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한다. 신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 역시 어떤 한 사람이 될 수 없다네. 그대가 작품을 꿈꾸었듯 나 역시 세상을 꿈꾸었으니까.(…)그대는 나, 신처럼 수많은 사람일 뿐 어느 한 사람이 아닐세." 2012년 '화가의 얼굴, 자화상'이란 제목으로 나왔던 책의 개정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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