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의 눈으로… 그림책에 '공간'을 담아요

    입력 : 2018.03.15 00:05

    [아동도서 최고 권위의 라가치賞 두 번째 수상… 그림책 작가 정진호]

    건축사무소서 일하다 진로 바꿔
    단 두 작품으로 세계적 작가 인정… 창의적 시선으로 공간 그려내

    건축을 그만둔 건 '조폭' 때문이었다.

    2010년대 초반 유명 건축가가 운영하는 건축사무소에서 인턴으로 근무할 때였다. 열 손가락에 반지를 낀 남자가 찾아와 설계를 의뢰했다. 자신을 '나이트클럽계 제왕'이라 소개한 그는 만남부터 결혼까지 한자리에서 이뤄지는 건물을 원했다. 지하엔 나이트클럽, 저층엔 결혼식장, 상층엔 호텔이 있는 구조였다. 문신을 한 젊은이들이 수시로 달려와 마음에 안 든다 욕하고, 돈을 깎아 달라 협박했다.

    '다른 직업을 생각해 봐야겠다' 궁리 끝에 택한 건 뜻밖에도 그림책. 정진호(31)는 "그림책은 작가의 의도를 끝까지 고수할 수 있어 내 세상이나 다름없다"며 웃었다.

    자신의 그림책들을 펼쳐 놓은 정진호 작가.
    자신의 그림책들을 펼쳐 놓은 정진호 작가. 작업실이 따로 없는 그는“낡은 필통에 색연필과 만년필, 직각 자 하나만 넣고 다니며 생각날 때마다 스케치를 한다”고 했다. /성형주 기자
    그는 이달 말 세계 최대 규모 아동 도서전인 2018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자신의 두 번째 그림책 '벽'(비룡소)으로 아동 도서 분야 최고 권위의 상인 라가치상(賞) 예술·건축·디자인 부문 우수상을 받는다. 2015년 첫 그림책 '위를 봐요!'(은나팔)로 같은 상(오페라프리마 부문 우수상)을 이미 받았으니, 단 두 작품으로 세계가 인정하는 작가가 된 셈이다.

    건축가의 시선으로 길어 올린 소재와 그림이 독특하다. 2014년작 '위를 봐요!'는 차 사고로 다리를 잃고 매일 베란다에 혼자 나가 아래를 내려다보던 수지가 위를 올려다본 아이와 친구 되는 과정을 담았다. 2016년작 '벽'은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걸작 롱샹성당에서 영감을 얻었다. 라가치상 심사위원들은 '아이가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공간의 세계를 아주 멋지게 표현했다'고 호평했다. 세 번째 그림책 '별과 나'는 한밤중 라이트를 끄면 주변이 더 잘 보이는 경험을 살려 썼다. '위를 봐요!'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평면도, '벽'은 건물을 입체로 보는 투시도, '별과 나'는 옆에서 보는 단면도를 끌어다 썼다. 일종의 '건축 3부작'이다.

    정진호의 오른손 중지와 약지에는 눌어붙은 화상 자국이 있다. 두 살 때 펄펄 끓는 압력밥솥에 손을 댔다가 손가락 두 개가 붙어버렸다. 뼈는 자라는데 피부 이식 수술은 중 2가 돼서야 끝나 항상 붕대를 감았다. 그림책과 동화를 벗 삼아 지루함을 견뎠다. 그 기억이 맞물려 작품 '벽'이 됐다.

    "롱샹성당은 안팎의 경계가 따로 없어요. 어디를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안이 밖이 될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지요. 겉으론 별로인 것 같은 사람도 알고 보면 좋은 경우가 많잖아요."

    건축을 그만둔다 했을 때 "밥 굶기 딱 좋다!"며 한사코 반대했던 부모님이 지금은 가장 큰 후원자다. 손주들에게 아들의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매력에 빠졌다. 그가 그림책을 권하고 싶은 대상 또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글자가 커서 안경 없이도 잘 볼 수 있고, 삶의 지혜와 감성이 섞이면 더 특별한 책이 된다.

    "어른들은 절대 하지 않을 질문을 아이들이 할 때 가장 기쁘다"고 했다. "왜 강아지를 수컷으로 그렸냐, 앞에 나오는 아이와 뒤에 나오는 아이는 원래 알던 사이냐 등등. 어른들은 훌렁 넘기는데, 아이들은 반복해 읽으니까 역시 좋은 독자!"라고 했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한 후속작을 준비 중인 그는 "버려진 것, 외로운 것, 남들은 안 보는 걸 눈여겨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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