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돈 벌러 간 펀드매니저, 反푸틴 운동에 뛰어들다

    입력 : 2018.03.30 23:59

    러시아서 실적 1위 펀드 대표
    탈세 고발 사건에 휘말리며 사업 터전 잃고 동료 살해돼
    목숨 걸고 인권 운동에 투신

    적색 수배령

    적색 수배령

    빌 브라우더 지음 | 김윤경 옮김
    글항아리 | 496쪽
    | 1만9500원

    탈세는 대개 민간이 저지르고 국가는 이를 적발한다. 2000년대 중반 러시아에서는 그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러시아 내무부 관료들이 2억3000만달러(약 2450억원)의 세금을 횡령해 착복했고 한 외국인 펀드회사가 이 사실을 밝혀냈다. 미국 출신의 영국인 펀드매니저인 저자 브라우더는 그 사실을 폭로한 허미티지 펀드의 CEO다. 푸틴의 눈 밖에 났던 브라우더는 이미 국외로 추방된 상태였고, 허미티지의 러시아인 임원들은 살해 위협에 시달리다가 러시아 밖으로 탈출했다. 37세의 이 회사 변호사 세르게이 마그니츠키만 "잘못한 게 없다"며 러시아에 남았다. 그는 경찰에 체포됐고 약 1년 뒤인 2009년 11월, 교도소 내에서 침대에 묶인 채 살해당했다.

    마그니츠키의 죽음을 계기로 러시아 공직자들의 파렴치한 탈세 행각과 인권 탄압, 증거 인멸 행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3년 뒤인 2012년 12월, 미 의회는 러시아 인권침해 사범의 미국 비자 발급을 중단하고 그들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는 내용을 담은 '마그니츠키법'을 통과시켰다.

    소련 해체 이후 단행된 러시아의 공기업 민영화는 혼란스럽고 어설펐다. 러시아 정부는 1억5000만 국민 모두에게 민영화 바우처를 무료로 한 장씩 배포했다. 이를 다 합치면 러시아 기업 30%와 교환할 수 있었다. 당시 바우처 한 장의 시장 가격은 20달러이니 1억5000만장이면 30억달러다. 러시아 기업 전체의 가치가 월마트 주가 총액의 6분의 1인 100억달러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러시아인 대부분은 그 무료 바우처를 7달러짜리 보드카 한 병과 맞바꿨다. 브라우더가 재빠르게 2500만달러를 투자해 사 모은 바우처는 그 후 1억2500만달러로 뛰었다. 러시아 최대 석유·가스회사인 가스프롬에 투자해서 100배의 수익도 올렸다. 1997년엔 세계 실적 1위 펀드에도 올랐다.

    빌 브라우더 허미티지 펀드 CEO가 2016년 3월 캐나다 토론토의 러시아 영사관 앞에서 열린 러시아의 인권 침해 항의 집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빌 브라우더 허미티지 펀드 CEO가 2016년 3월 캐나다 토론토의 러시아 영사관 앞에서 열린 러시아의 인권 침해 항의 집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Mykola Swarnyk·위키피디아
    2000년 집권한 푸틴은 정권 장악에 걸림돌이 되는 올리가르히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브라우더를 보호했다. 하지만 올리가르히들과 유착되며 브라우더와 사이가 벌어졌다. 브라우더를 내쫓은 뒤 허미티지 펀드가 소유한 회사들을 빼앗았다. 이 회사들은 정부를 상대로 세금 환급 소송을 벌여 허미티지가 러시아에 낸 세금 2억3000만달러를 환급 받아 착복했다. 배후에는 부패한 러시아 내무부 관료들이 있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세금 횡령을 내무부에 출석해 진술한 마그니츠키는 경찰에 체포됐다. 마그니츠키를 구금한 내무부 관리는 물론이고 구금을 승인한 판사 등이 이 과정에 공모했다. 푸틴도 2012년 12월 기자회견에서 "마그니츠키는 고문이 아닌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브라우더와는 공범"이라 주장했고 인터폴에 요구해 브라우더에게 적색 수배령을 내렸다. 적색 수배는 살인·강도·횡령 등 중범죄자의 인도를 요구할 때 발령한다. 러시아는 범죄 증거를 조직적으로 은닉했다.

    다행히도 마그니츠키는 수감됐던 358일 동안 450건의 형사고발장을 작성해 정부에 제출했다. 그가 고발장에 담은 국가 범죄와 고문 등의 기록이 브라우더 등 동료들의 노력을 통해 전 세계에 폭로됐다. 월수입 1500달러인 러시아 내무부 관료가 260만달러의 재산을 모았고 전용기로 휴가를 다닌다는 사실 등을 고발하는 유튜브 동영상 '러시아 언터처블' 시리즈도 제작됐다. 새로운 동영상이 뜰 때마다 서방은 물론 러시아 언론이 달려들어 기사를 썼다. "형이 살해당했다" "남편이 실종됐다"는 폭로도 잇따랐다.

    2014년 4월, 유럽의회도 러시아의 범죄자들을 제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브라우더가 마그니츠키의 아내 나타샤와 아들 니키타를 데리고 현장에 나타나자 700명 남짓 의원 전원이 일어나 그들을 향해 오랜 박수를 보냈다. 나타샤의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책을 읽는 동안 최근 영국에서 발생한 전직 러시아 간첩 부녀 암살 기도 사건이 겹쳐졌다. 러시아는 "증거를 내놓으라"며 혐의를 부인한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이란 증거를 대라"는 최근 우리 내부의 억지 주장이 겹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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