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끝에서 흘러나오는 밤…홍일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 뉴시스

    입력 : 2018.04.12 10:33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책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빈 그릇에 담긴 것은 다 식은 아침이거나 곰팡이 핀 제삿밥이었다 콜로세움의 노인도 피렌체의 돌계단 아래 핀 히아신스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은 유적의 차가운 발등에 남은 손자국만큼 허허로운 일이나 한 번의 키스는 신화로 남아 몇 개의 문장으로 태어났다 불꽃의 서사는 오래가지 않아서 가파른 언덕을 삼킨 저녁의 등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지상의 꽃들은 숨쉬지 않았다 눈길을 주고받는 사이 골목은 저물고 나는 입 밖의 모든 입을 봉인하였다 여섯시는 자라지 않고 서쪽은 발굴되지 않았다 삽 끝에 부딪는 햇살들이 비명처럼 날카로워졌다 흙과 돌 틈에서 뼈 같은 울음이 비어져나왔다 오래전 죽은 악기였다 음악을 놓친 울림통 안에서 검은 밤이 쏟아져나왔다 나는 다만 노래를 가지러 왔다."('악기' 전문)

    시인 홍일표(60)의 네번째 시집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가 출간됐다. 1988년 '심상' 신인상과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등단한 시인은 시집 '살바도르 달리풍의 낮달' '매혹의 지도' '밀서' 등을 냈다.

    이번 시집에는 총 61편의 시가 담겼다. 시 제목과 시가 시작되는 도입 첫 문장에 밑줄을 그어 나란히 봐달라고 청했다.

    "예컨대 이렇게다. '빵'=나는 부풀어 무명의 신에게 닿는다, '귀로'=9층이 9층 밖으로 범람한다, '원반던지기 선수의 고독'=나는 하나 남은 태양을 쥐고 있다, '쥐'=빛의 손가락이 닿지 않는 구멍에서 혼자 눈뜨는 검은 별을 본 적이 있다, '감자가 있어요'=사슴뿔 같은 푸른 왕관을 쓰고 있던 이의 마음이었나요, 등등 재미를 붙여가면서 말이다.""바람이 빈집을 몰라보고 그냥 지나갑니다 떨어져나간 문짝도 깨진 유리창도 바람의 발목을 잡지 않습니다 동서남북 통달하여 어디로든 몸을 내줄 자세입니다 주저앉아 명상중인 빈집은 이미 제 몸은 잊은 지 오래입니다 해변에 죽은 갈매기처럼 비밀이 빠져나간 무덤입니다"('서쪽의 집' 중)

    "눈썹은 가볍고 여린 들창 같은 것/ 그렇게 말하던 어디선가 혼자 비 맞고 있는/ 눈물방울 같은 아이// 차라리 가시철조망이라고 하자/ 철조망의 이데올로기라고 하자"('눈썹' 중)

    홍씨는 "남은 빛을 끌어모아 뼛속에 철심으로 세울 때까지 펜 끝에서 흘러나오는 밤을 따라가면 조금씩 피가 붉어지는 동쪽"이라며 "언어가 닿지 못하는 그곳이 멀지 않아 다시 이곳에 없는 시(詩)로 걷는다"고 전했다. 136쪽, 8000원,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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