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 하나도 다 달라… 호기심 잃으면 진짜 늙은 거라네"

    입력 : 2018.04.20 23:05

    영국 고생물학자 리처드 포티, 은퇴 후 숲 사들여 1년간 관찰
    "튜더 왕조도 산업 혁명도 나무가 기억하고 있었네"

    '나무에서 숲을 보다'
    나무에서 숲을 보다|리처드 포티 지음|조은영 옮김|소소의책|416쪽|2만5000원

    시인의 심장을 지닌 과학자가 쓴 아름다운 책이 나왔다. 저자는 고생물학자 리처드 포티(72). 2006년 런던 자연사박물관 선임직에서 물러난 그는 2011년 7월 런던 교외의 숲 '그림다이크'를 매입한다. 너도밤나무 180여 그루가 있고 바닥엔 종(鐘) 모양의 푸른 블루벨 꽃이 깔린 숲 넓이는 1.6헥타르(약 5000 평). '숲의 주인'이 되자 수집욕이 솟아났다. 숲에 서식하는 생물 종의 목록을 완성하고 싶어진 것이다. "과학자가 표본을 수집하듯 체계적 방식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느끼는 순진무구한 기쁨 같은 것으로. 어쩌면 나는 다시 한번 소년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포티가 그림다이크에서 1년간 관찰하고 채집한 것을 기록한 일지(日誌)이자 나무를 통해 숲의 역사, 영국사 및 목재 산업의 역사를 아울러 짚어보는 일종의 미시사(微視史)다. 그는 숲에서 벌목한 벚나무로 18세기 유럽 귀족들이 진기한 물건을 넣어두었던 '호기심 상자'를 만들어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채워 넣기로 결심한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나는 호기심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호기심은 확신의 적"이라는 포티의 말이다

    일지의 시작은 4월이다. 너도밤나무 새순이 단단한 봉오리를 뚫고 나오기엔 너무 이른 계절. 덕분에 숲은 빛의 세례를 온전히 받고 있다. 블루벨 융단 깔린 숲을 묘사하는 포티는 시심(詩心)으로 가득하다. "이 숲은 거장의 손길이 스친 듯 바닥에 마법의 기운이 자욱하다."

    '그림다이크(Grim's Dyke)'는 '악마의 제방'이란 뜻으로, 숲에 있는 고대 유적지 이름을 땄다. 숲은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드 그레이 가문 장원(莊園)의 일부가 됐다. 1503년 헨리 7세는 장원과 저택을 의정관 로버트 놀리스에게 수여한다. 여기서부터 숲의 역사는 튜더 왕조와 얽혀 흥미진진해진다. 로버트 놀리스의 아들 프랜시스는 1545년 엘리자베스 1세의 이종사촌 캐서린과 혼인한다. 프랜시스와 캐서린의 아름다운 딸 레티스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모했던 로버트 더들리와 은밀히 결혼한다. 격노한 여왕은 레티스를 '암늑대'라 부르며 증오한다. 포티는 썼다. "레티스는 사냥을 좋아했다고 한다. (…) 나는 사슴을 쫓아 우리 숲을 활보하는 레티스를 떠올리는 게 좋다."

    일지를 적고 있는 포티.
    일지를 적고 있는 포티. 그는 4월의 벚꽃을 보고“한 무리의 발레복처럼 바깥쪽으로 접힌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공연에 경의를 표하는 듯하다”고 썼다. /소소의 책
    환경 보호 개념이 없던 먼 옛날, 숲은 상업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수익을 내지 못하는 숲은 다른 용지로 개간되었다. 산업화 시대 이전 그림다이크의 너도밤나무는 땔감으로 유용했다. 단단한 참나무는 수레바큇살로 사용됐다. 19세기 전반부 운하가 영국 전역으로 확산되며 석탄 공급이 용이해진다. 런던에서 땔감 수요가 곤두박질치면서 수익성을 잃은 그림다이크의 미래도 불확실해진다. 숲의 운명을 구한 건 목공예다. 의자 제조업은 19세기 들어 급성장했다.

    증기 시대에도 그림다이크는 살아남았다. 1851년 '로열 레가타'라는 조정 대회가 인근에서 열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조정 대회의 매혹적 배경으로 숲을 다시 보게 된다. 양차 세계대전도 숲을 죽이지 못했다. 너도밤나무 목재는 라이플총의 개머리판을 만드는 데 이용됐다. 막사를 땅에 고정하기 위해 나무못이 필요했다. 종전 후 그림다이크의 너도밤나무는 솔 손잡이로 사용된다. 1982년 플라스틱에 밀려 솔 손잡이 공장이 문 닫았지만 2000년대 초 해리 포터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아이들이 해리 포터처럼 빗자루 타고 날아다니고 싶어 하자 '빗자루 대박'이 터지면서 숲은 약간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숲의 경관은 시적으로, 역사와 생물학 부분은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호기심 왕성한 노(老)과학자는 4월엔 산미나리의 어린 잎을 뜯어 수프를 끓이고, 5월엔 너도밤나무 새순으로 술을 빚으며, 12월 호랑가시나무 가지로는 지팡이를 만든다. 그리하여 이 매혹적 박물지가 완성되었다. 한 해 동안의 프로젝트를 마치고 북숲쥐가 갉아먹은 체리 씨, 빈 지빠귀 알껍데기, 겨울잠쥐의 둥지 등을 호기심 상자에 넣으며 포티는 말한다. "이제 호기심은 채워졌다. 당분간은." 원제 'The Wood for the Tr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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